“축구는 내 사명… 월드컵 우승의 초석이 됐으면… - 차범근 감독과의 만남
눈부처를 바라보며 화쟁의 길을 묻다 - 원효대사와의 가상 인터뷰
특집을 기획하며｜B급, 非급, 秘급 ①B라는 말로 우리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들 ②비(秘)급을 향해, 그저 온전한 의지로서 ③비급 작가로 살기 ④도서출판 b, b급 맞습니까?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와 말년의 양식(Late Style)
무화되는 품위, 최선을 다하는 삶과 역사 - 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남아 있는 나날』
고전 산문의 마지막 불꽃 -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대가 정인보의 『담원문록』
“사랑, 추억 그리고 비애에 대한 거장다운 통찰” - 아일랜드의 맨부커상 수상작가 존 밴빌과의 만남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①강남 스타일,백 년 동안 새로운 노년 ②눈 내리는 거리,묘지 식탁
첫번째｜시인의 나무 세번째｜술과 글 두번째｜'문학'하는 요괴를 바라보며 네번째｜문학이 죽으면 성실해지겠죠
①자신의 세계, 건강함 그리고 작가의식 ② 우리의 우리에게… 점과 점을, 잇는 선, 으로 이루어진, 육면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몇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세계. 그리고, 빛에 대해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 소설집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의 작품’으로 - 독역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리뷰
번역의 출발선과 마침표에 대하여 -영역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제야 당신을 만납니다 -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
글 구자명 ㅣ 구상 시인의 딸, 소설가,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1957년생 소설 『건달』 『날아라 선녀』 『진눈깨비』, 에세이집 『바늘구멍으로 걸어간 낙타』 『망각과 기억 사이』 등
구상 ㅣ 시인. 1919~2004년 시집 『초토의 시』 『까마귀』 『구상』 『모과 오두리에도 사연이』 『구상 시 전집』 『홀로와 더불어』, 사회평론집 『민주고발』, 수필집 『삶의 보람과 기쁨』 『영원 속의 오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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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쌀쌀한 밤공기가 생애 첫 음주로 인한 몸의 열기를 빠르게 식혀 약간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입고 있던 스웨터의 팔 자락을 늘여 그 속에 손을 넣고 덜렁덜렁 흔들며 걸어갔다.
“손 빼라.”
술기운이 묻어나는 나지막한 음성이 첫 명령을 내렸을 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소년은 가볍게 대꾸했다.
“추워서요. 이렇게 하면 장갑을 낀 거처럼 따뜻해요.”
더 낮아진 목소리가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손 빼. 사내자식이 볼썽사납다.”
이 대목에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웃었는지 어찌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그는 코흘리개적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 말에 뭐라고 응석 투의 대꾸를 했던 것 같다.
“너 그 표정이 뭐야? 그리고 뭐 어째? 이 자식이!”
짙은 니코틴 냄새가 스치면서 뺨에 번쩍 불이 일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를 모델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쓰기 시작했으나 몇 해째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이 에피소드는 나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실화로, 여기 그 소년이 바로 열여섯 살 소녀 적의 나이다. 굳이 이 일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와 나, 나아가서 가장으로서의 구상 시인이 생전에 가족과 가졌던 소통방식을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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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구상 시인은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좌우명으로 삼는 유가적 선비의 면모를 평생 유지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남들을 대할 때 봄바람처럼 유연하고 관대했으나 당신 스스로에겐 서릿발같이 삼엄한 기준을 적용하는 삶을 사셨다. 조선시대로 치면 군자의 풍모로 칭송받아 마땅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감이 중요시되는 시대에, 그것도 마치 가족이 당신 자신의 알터 에고(alter ego)라도 되는 듯이 그 삼엄한 기준을 확대 적용시키셨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처럼 아버지는 자신과 가까울수록 자신에게 하듯 엄격하게 대하셨고, 그 혜택보다 늘 먼저 닥치게 마련인 피해는 고스란히 가족의 몫이었다. 위 에피소드에서처럼 어린 자식들의 소소한 어리광이나 작은 실책도 순순히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고, 항간에서 표현하듯 ‘구원’의 반려였던 천사표 아내에게도 엄하기가 그지없었다. 동갑내기였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나무람을 받을 때 칠십이 넘어서도 무릎을 꿇고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드물게 여성으로서 의학공부를 하여 전문의가 되어 평생 병원을 운영했던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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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편 남에게는 놀라우리만치 너그러우셨다. 문단, 언론계, 대학 등에서 알고 지내는 동료, 선후배, 제자들은 물론 문화계 및 사회 제 분야에 걸쳐 ‘천연기념물’급의 다양한 인간관계를 평생 이어갔던 아버지는 남의 허물을 잡아 다투거나 내치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그러기에 자식인 우리가 보기에 한심한 사람들마저 주위에 그대로 두셨고, 모든 사람들이 왜 저런 인간을? 하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과도 친분을 유지하셨다. 어찌 보면 무골호인이랄 수도 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정의로움의 대원칙이 있어 그것을 근본적으로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웬만하면 다 포용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구상 시인을 문학인을 넘어 어떤 종교적 경지에 도달한 성인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얘길 들을 때 가족의 마음은 흔쾌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자식들인 두 오빠와 나는 각자 성가하여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를 신참 졸병이 사단장을 대하듯이 군기가 빳빳이 들어 상명하복 해온 터였기에 타인에 대한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위선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오빠들은 그들 나름대로 격렬히 저항했고 나는 나대로 아버지가 바라시는 것들을 교묘히 피해 다른 길로 새 버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자식들로 인해 많이 외로우셨을 것이다. 어느 땐가 우리의 저항감이 어머니에게도 지나치게 느껴졌는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간병하느라 병실에서 지새던 나의 손을 잡으며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그 양반도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나의 저항감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두 오빠가 아버지에게 참척의 고통을 안겨주고 먼저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14년 전 부친의 임종 자리를 홀로 지켜야 했던 나는 그때까지도 심연에 대답 받지 못한 물음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나요?’ 한 번도 소리 내어 입 밖에 내보지 못한 물음이기에 대답 또한 직접 들어볼 기회를 놓친 채 아버지가 숨을 거두신 그 새벽 깊은 회한으로 어찌할 바 모르고 병실 뒤 계단에 숨어 혼자 가슴을 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치부랄 수도 있을 이런 사실을 처음으로 이렇게 외부에 토로하는 이유가 있다.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그만큼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피나게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는 문학도 개인적 삶의 실존적 진실이 ‘등가량(等價量)’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 여겼거니와, 자기 십자가를 메고 예수가 홀로서 갔듯 자신의 골고다 언덕을 가기를 거부하는 삶은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 여겼다. 아버지가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다음 말씀도 그처럼 자신이 믿는 바에 투철하고자 몸부림친 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오리들이 둥둥 떠 있는 걸 보면 세상에 없이 편안하고 한가로워 보이지만 사실 놈들은 물속에서 죽어라고 자맥질을 하고 있단 말이야!”
내가 사십이 넘어 소설가로 등단하여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자 아버지는 처음으로 기쁨을 감추지 않고 말씀하셨다. “내가 써보지 못한 게 소설인데, 네가 잘 해보기 바란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결단코 다른 길을 가리라 마음먹고 있던 나는 시인 아버지로 인해 혜택 받았을 일정 몫의 문학적 유전자나 어릴 적부터 노출되었던 문학적 환경의 이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문학적 소통도 없이 수년 간 아버지 병수발을 들다가 떠나시고 나서 홀로 남은 유족의 도리로 아버지 기념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본의 아니게’ 아버지가 남긴 글들을 다시 읽고 아버지의 업적에 대한 재조명 작업도 하게 되고 아버지의 인간관계 네트워크에 대한 재발견도 하는 동안 십수 년 세월이 또 흘렀다. 그러면서 문학인 구상, 언론인 구상, 교육가 구상, 구도인 구상 등등 아버지의 여러 면모에 대해 새로운 배움과 이해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족이나 자식으로서 이해한 인간 구상만이 아닌, 천의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다. 글머리에 올린 에피소드가 있었던 즈음의 아버지보다도 나이를 더 먹게 된 요즘에 이르러서야 나는 아버지의 진실이 좀 보이는 듯하다. 그 수많은 모습에 하나하나 진정을 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내게 소통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신 걸 알게 됐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라고.
내년은 아버지 구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 나라의 대표성 있는 문인의 존재를 한 세기에 방점을 찍어 기념하는 일이 유족이나 일부 친지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유의미한 일이 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럽다. 이 제한된 지면의 글이 단지 그 진솔성 자체로 말미암아 좋은 의견들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라도 되어준다면 참 고마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