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사랑의전당殿堂

세비야, 유쾌한 열정과 빈티지의 황홀

“외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예술”

파리-평양-서울을 달리는 평화열차를 꿈꾸며

한국인의 의식현상학, 시험판

이상 소설 「날개」 이어쓰기 ①사이렌이 울릴 때 ②마지막 페이지 ③1교시 국어영역 ④우리들은 마음대로 ⑤진술에 따르면 ⑥대합실에서

“역사를 알 때 예술의 추상주의를 알 수 있다”

태양이 한 마리 곤충처럼 밝게 뒹구는 해질녘, 세상은 한 송이 꽃의 내부

①만찬 ①그럴 때가 있다 ②절 전화 ②고구마의 말

①북쪽 별을 찾아서 ②미래과거시제

첫 번째｜마침표 유감 두 번째｜아주 흔한 위로 세 번째｜텍스트와 세계 네 번째｜집을 떠나 집으로

①전후 국가재건 토목사업에 헌신한 ‘후반기’ 모더니스트 ②시대를 풍미한 『얄개전』을 쓴 딸바보 ③시와 후학과 커피를 사랑한 ‘동해안의 시인’

그리운 예술가(藝술架)

되돌릴 수 없는 7년, 되살리지 못한 7년

“말로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타는 목마름

대산창작기금,외국문학 번역지원

2018 외국문학 번역지원 공모,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등

창작 후기

치명적인 것들

시집 『치명』

글 김산 ㅣ 시인. 1976년생
시집 『키키』『치명』 등

창틈으로 들어오는 한줌 햇살에 아침을 맞았다. 바람도 제법 살랑 살랑 불어오고 기분도 싱그러웠다. 일어나서 처음 한 일은 세수도 하 지 않고 어제 욕조에 세제를 넣고 불린 속옷과 수건 따위를 손빨래한 일이다. 복숭아나무가 있는 마당에 빨래를 널어 바람에 나부끼는 광 경을 보고 싶었다. 여기는 서울 한남동 재개발을 기다리는 허름한 2층 단독주택이다. 얼마 전, 알고 지내는 소설가의 배려로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마당 귀퉁이에 쌓인 와인병과 맥주병을 치우고 침대와 옷장을 들여놓고 쓸고 닦느라 열흘이 금방 지나갔다. 문명의 도시답지 않게 아침이면 새소리가 들린다. 방치된 폐가가 많은 이곳에서는 볼륨 을 최대치로 틀고 스피커로 음악을 들어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최 적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나는 또 어떤 삶을 살 게 될는지. 다음 주면 이곳에서 와인파티를 하기로 했다. 집들이 핑계 로 지인들과 한자리를 하게 되어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쁜 날들이다. 두 번째 시집 『치명』은 출간되기까지 여러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 번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메이저 출판사를 포기했고 계약까지 한 다른 출판사는 내부 사정으로 인해 계약금을 다시 돌려주고 원고를 반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원고를 달라 했던 편 집진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전원 퇴직을 해서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대산창작기금을 받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발간을 하지 못해 나름 마음의 빚처럼 무거웠다. 그러던 즈음 지금의 출판사를 만났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해설과 표4도 내가 생각했던 분들의 글들을 담을 수 있었고 작년에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김춘수시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십여 명 의 지인들이 서울에서 축하를 해주러 통영까지 오셔서 시상식 자리는 매우 풍성하고 즐거웠다.
사실, 금번의 이 시집은 어떤 사람을 위한 송가라고 볼 수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병으로 일찍 하늘로 올 라간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인 것이다. 첫 시집이 “우주적” 시점으로 지구별에 자발적 불시착을 해서 방황하 는 군상을 그렸다면 이 두 번째 시집은 무력해진 자아의 몸으로 다시 죽음(귀향) 쪽으로 기울고 있는 이야기 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육신의 썩음이 아니라 정신의 부재에 따른 또 다른 이 탈을 꿈꾸는 환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시집을 내고 두 번의 레지던시를 경험했다. 횡성의 예버덩에서는 입주 작가로 들어갔다가 어쩌다 보니 매 니저로 8개월을 상주하게 되었고 독사에게 물려 응급실에 실려 가는 아찔한 경험도 했다. 올해 원주의 토지 에서는 많이 걸었다. 앰프를 들고 다니며 들판과 호숫가에서 큰 소리로 음악을 듣곤 했다. 물새들이 리듬에 맞춰 날갯짓을 할 때면 마치 보이지 않는 음파가 물결 위로 너울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으며 작업실에 합주실을 만들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책상 위에서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있다. 어느새, 등단한 지 12년 차가 되었다. 시집 두 권과 고전문학 책을 냈고 200편이 넘는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몇 번의 상을 받기도 했고 이곳저곳 제도권 밖에서의 강의 도 하면서 바쁘게 지냈지만 정작 지금 생각해보면 아련하고 아픈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직업 하나 없이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지금까지 연명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다. 치명적인 것들은 없다. 우리가 부르는 “치명”이 개인의 삶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일상이 되는 경 우가 많기 때문이다. 독사에 물려 까맣게 썩어가는 손가락을 보고 있었을 때도, 물새들이 리듬에 맞춰 날갯 짓을 하는 광경들도 결코 치명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독사에게는, 물새에게는, 그것이 일상일 뿐이니까. 나 의 범상함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는 순간에 대해서 나는 자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시지 만 그것으로부터 내가 드러나는 순간에 대해서 스스로가 밀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시가 써질지는 나도 모른다. 내 안과 밖이 뭉뚱그려져 어떤 상황을 발생시킨다면 그것에 대 해 본능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한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나의 시는 다음 주에 있게 될 이 작업실에 서의 와인파티다. 오랜만에 애정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면 나는 그 힘으로 오랜 시간 또 혼자 지 낼 수 있을 것이다. 작업실 곳곳에 남겨져 외따로이 울고 있을 웃음소리들. 가끔 배가 고플 때 꺼내먹으면 심장이 따뜻해지는 것들. 벌써부터 그것들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다.

※필자의 시집 『치명』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17년 파란에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