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경희

런던, 낡음을 견디는 외로움의 제국

나는 김혜순으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김혜순으로 살다가 다시 김혜순이 아닌 곳으로 가게 되지요!

특집을 기획하며 ①특별한 계기에 쓴 시 ②극지에서 고독에 떨며 피흘리며 쓴 「사람의 가을」과 「응」 ③운명적인 만남 ④저주받은 걸작은 끝내 쓰지 못한 걸작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걸어온 시인*

오직 드높고 푸른 자유 그것이면 된다

쇳물의 뜨거움이 담긴 「야학일기」 연작 7편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사당학파 사람들

종일 본가 (終日本家)하지 않기 위해서

가을 정원, 색(色)과 향(香)의 향연

우리가 아는 ‘그 가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①어제 죽었다면,토지 탁구 ②배틀그라운드

①슬픈 얼굴의 기사 ②불타는 수용소

황금을 훔치는 거인

소설에서의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①이웃 나라 ②걸으면 걸을수록 ③뮌스터 가는 기차

이번 생은 망했지만 뭐 어때

①새로운 개성과 공감의 가능성을 열다 ②제27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독일 사람은 모르는 ‘삼계탕’과 ‘식혜’ 그리고 수많은 ‘무명氏들’

출발어 중심의 번역과 도착어 중심의 번역 사이에서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2019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창작 후기

수상소감, 아이패드, 소설집, 자두

소설집 『오늘 밤에 어울리는』

글 이승은 ㅣ 소설가, 1980년생
소설집 『오늘 밤에 어울리는』 등

2014년 계간지 『문예중앙』 봄호에 등단작 「소파」와 함께 내 얼굴이 커다랗게 실렸다. 나는 초조해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열심히 쓰 겠다는 내용의 수상소감을 신인 문학상 시상식에서 낭독했다. 이후 로 5년 동안 수상소감과는 정반대의 나날을 보냈다.

2016년에는 일을 줄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자주 갔다.
좁은 열람실은 빈자리 없이 빽빽했다. 그날도 구석 자리에서 소설을 써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책상을 두드렸 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나는 손을 멈추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책 상마다 붙어있는, 종이를 코팅한 주의사항을 가리켰다. ‘노트북 키보 드 사용 시 주의해주세요.’ 남자는 참고 참다가 내 책상을 두드린 게 분명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거칠고 요란하게 자판을 두드려댄 게 분 명했다.
그해에 창작기금을 받았다. 오랜만에 원고 청탁도 받았는데 마감 일에 맞춰 송고한 후에도 계속 원고를 고쳤다. 소설이 얹힌 PDF 파 일이 첨부된 이메일에 수정할 부분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여 답신했다. 한두 문장이 아니라 한 단락을 넘어선 부분도 있었다. 그 때는 다른 사람의 수고보다 내 소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해 겨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서 동료 작가의 출간이나 수상 소식에 조급 해했다. 다음 해에는 고등학교로 주 5일 수업을 나갔다. 그즈음 아이패드를 사서 일기를 쓰기 시작 했는데 4월에는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 같다, 고 썼다.

2019년 4월에 첫 소설집이 나왔다. 지인들에게 책을 보내고 축하도 받았다. 엄마는 소설집 관련 신문 기사를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고 아빠는 인생 목표를 이루어가는 딸이 자랑스럽다는 문 자를 보내주셨다. 7월에는 공동 낭독회를 했다. 진행자의 불안과 사물, 풍경에 대한 물음에 나는 얼굴과 표정에 대한 이야기로 답했다. 낭독회가 끝난 후에는 사인을 했다. 내 소설집을 들고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나는 기뻤다.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며칠 동안 들떠 있었다.

몇 주 전에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자두를 샀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생긴 후로 장사가 잘 안 되는 가게였는데 바구니에 담긴 자두가 탐스러웠다. 자두 3,000원어치를 사면서 나는 기분이 상했 다. 주인이 짓무른 자두를 바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을버스에 오르며 다시는 이 가게에서 과 일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검은 봉지 안에 든 자두가 움직였다. 허벅지 위에서 말캉거리는 자두의 검 붉은 껍질은 속이 비칠 것처럼 얇았다. 표면이 찢어지면 과즙이 흐르면서 여린 속살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짓무른 자두는 찢어진 틈으로 속살을 보였다. 나는 그 자두 한 알을 바꿔 달라고 했다. 가게 주인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바구니에 한 번 담긴 건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전혀 언성 을 높이지 않았다. 그저 단호해서 말을 더 붙일 수 없었다. 짜증을 내 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 지만, 화가 난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몇 년 전 도서관에서 내 책상을 두드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버스 창밖으로 가게와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서는 검붉은 피부의 누군가를 상상 했다. 내 소설 속 주인공들도 떠올랐다. 나는 자두가 서로 부딪혀 터지지 않도록 봉지를 여몄다.
그날 마지막으로 본 건 다른 얼굴이었다. 쉽게 들떴다가 금방 지쳐 쫓기듯 굴다가 양 볼을 붉히 는. 화풀이하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무표정에 가까운. 내가 분명히 아는 얼굴이지만 모른 척하고 싶 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 필자의 소설집 『오늘 밤에 어울리는』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19년 창비에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