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혜순으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김혜순으로 살다가 다시 김혜순이 아닌 곳으로 가게 되지요!
특집을 기획하며 ①특별한 계기에 쓴 시 ②극지에서 고독에 떨며 피흘리며 쓴 「사람의 가을」과 「응」 ③운명적인 만남 ④저주받은 걸작은 끝내 쓰지 못한 걸작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걸어온 시인*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소설에서의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①새로운 개성과 공감의 가능성을 열다 ②제27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오직 드높고 푸른 자유 그것이면 된다
글 박정대 ㅣ 시인, 1965년생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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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하얀 말을 타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49일이 지나면 말은 타고 남은 재처럼 바스러지고 그 말을 타고 떠돌던 영혼마저 연기처럼 흩어져 지상의 구름으로 흩어진다
흩어진 구름들이 백만 년의 세월을 떠돌다 우연히 모여 한 방울 눈물로 다시 지상에 올 때 빗방울은 너의 눈빛, 너의 목소리, 너의 형상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구름의 한 세기가 지나간다, 너는 그걸 육체쇼와 전집이라고 말했지만 모든 삶은 낱낱이 흩어져 구름으로 가고 구름은 고독과 침묵 저 너머로만 흐른다
언젠가 널 만났을 때 “형은 왜 맨날 늦어요?”라며 넌 투정을 했었지, 사랑은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하고 언제나 조금 빠르게 떠나간다
병승아 잘 가라, 네 사랑도 함께 잘 가라
오직 드높고 푸른 자유, 그것이면 된다
2019년 7월 24일, 황병승의 타계 소식을 듣고
*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구입해 액자 뒤편에 숨겨두었던 불란서 철학자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세상의 도덕률이 세상의 기원을,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앙드레 마숑의 그림 뒤에 숨겼다
드러나지 않는, 숨어있는 실체가 예술의 본질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을 억압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예술가의 정신적 고군분투를 이끄는 스승이 된다
예술의 적이 예술의 스승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진정한 예술가들은 예술의 고아를 자처하며 자신의 고독과 침묵을 한 장의 지도로 기록한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오늘은 염소의 뿔도 녹는다는 대서(大暑),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집시 무희 에스메랄다가 키우는 염소 ‘잘리’는 담배도 잘 피우고 글도 잘 쓰지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는 과연 어떤 것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보다 사람이 더 활동적인 순간은 없으며 고독 속에서만큼이나 혼자가 아닌 순간도 없다”라고 기원전 1세기에 살았던 카토는 말한다
글렌 굴드에게 라디오는 고독의 메타포였다, 그는 라디오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었다
어느 날 결국 굴드는 자신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연주할 것을 결정했다
글렌 굴드에게 질병은 고독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는 푸가(Fuga), 도주, 사라져가는 것을 좋아했다
<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 있다, 이 영화를 거의 열 번은 본 것 같다(나는 많이 봤다는 표현을 늘 “열 번은 본 것 같다”라고 말한다)
앨런 무어, 제임스 맥티그, 휴고 위빙, 빅토르 위고, 장 위그 앙글라드, 나탈리 포트만, 스티븐 레아, 레아 세이두, 트리스탄 바우에르(이런 이름들을 부르면 나는 왜 인류가 그리워지는 걸까)
대관령 밤의 음악제가 시작되면 강원도의 별빛 아래로 아름다운 인류가 새롭게 태어나리니 인류여, 햇옥수수나 함께 먹자
그러나 시인은 그 어느 나라의 인민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어느새 선율이 된다
사랑, 번민, 영혼, 무정부주의, 신성, 질병, 자본주의의 위기, 체 게바라, 북극, 동지들(아직도 나에게는 열두 척의 담배가 있소, 십이사도 같은 불꽃의 동지)
빗방울 속에 신이 있다
이곳에 모든 것이 있다
나쁜 습기들, 격파, 맑고 푸른 하늘, 질주, 도주, 연주, 나는 음악처럼 걷는다, 광대한 고독의 대륙, 풀물이 든 푸른 말발굽 소리, 흰색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면 급격히 어두워지는 거리, 낡은 스프링 갱지 노트, 여름밤, 맥주 몇 잔, 담배 연기, 열대야, 글쓰기, 독립적인 공간, 독립적인 영혼
불란서 고아의 지도, 대관령 밤의 음악제, 2권의 시집으로도 말할 수 없는 삶의 비의, 독립적인 영혼은 독립적인 공간에 존재한다
흔들의자는 자기만의 리듬을 갖고 있지
창가에는 배고픈 고양이가 자주 오고 고양이가 두 눈의 등불을 밝힐 때면 어두운 밤도 함께 온다
밤새 글을 쓰고 아침이면 새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숲속의 다락방에 살고 싶다
바람은 언제나 거칠게 불지만 풀잎들의 뿌리를 더욱 든든하게 만들고 바람에 날아가는 풀씨들 속에서 단단하게 돋아나는 별들은 이미 아름다운 한 편의 시이다
보들레르 아저씨는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술을 마시러 가고 빅토르 위고 아저씨는 벌써 허름한 술집을 꿰차고 앉아 술을 마시며 글을 쓴다
에스메랄다가 없어도 좋다, 독립된 공간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노래할 수 있다면 콰지모도의 종탑방도 좋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 통영에 왔는데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를 만날 수 있는 객주집도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도 보이지 않는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서 김 냄새 나는 비를 꿈꾸었건만 소라방등을 보기엔 너무 밝은 대낮이었고 대낮부터 비가 내리긴 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멀리서 온 듯 내리는 빗방울 속에는 신이 있었다
비 내리는 오후, 바다도 보이지 않는 통영시청 뒤편 언덕길을 걸어 내려와 중앙로 근처를 하염없이 떠돌다 네거리의 순이를 생각하며 골목길 담벼락 끝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빛의 호위라고 했다, 멀리 있는 빛을 듣는 밤이다
오늘은 염소의 뿔도 녹는다는 대서인데 통영에는 아직도 대서소가 있을까
<레토(Leto)>(러시아어로 ‘여름’이라는 뜻)에서는 기타 하나 메고 숲길을 가던 빅토르 최의 모습이 좋았는데 키노(Kino)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빅토르 최의 드러머는 어디로 갔을까
1967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체가 타고 다니던 말은 아직도 살아있을까(죽었겠지, 죽었다면 무엇으로 환생했을까, 다시 태어나기는 했을까)
오늘은 염소의 뿔도 녹는다는 대서(大暑)인데 대서야, 한 마리 의열(義烈)한 뜨거움아, 일본도 미국도 중국의 제국주의도 모두 녹여버려라
시인아, 꿈틀거리는 한 마리 태풍아, 탐욕스런 자본주의와 국가이기주의를 모두 날려버려라
이 지상의 가장 뜨거운 푸르름만이 누군가의 깊은 내면에서 고독과 침묵의 시를 이끌어 내리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불란서 고아 같은 그대여
그대에게 스승이 없듯 나에게도 스승이 없다
나에겐 인류가 없고 나에겐 실체가 없다, 그러나 ‘없음’을 반복하는 반복의 ‘있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킬지 누가 아는가?
진정한 예술가는 예술의 고아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고아이듯 끝내 나는 나의 고아일 뿐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거다
오직 드높고 푸른 자유
그것이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