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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_ 욕망과 사랑의 경계는 어디인가?
- 『위험한 관계』

글 | 이대현_한국일보 논설위원,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등
 
1959년 프랑스 로제 바딤 감독과 1988년 미국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 1989년 밀로스 포먼 감독의 <발몽>과 10년 뒤인 1999년 로저 컴블 감독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그리고 2003년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이 다섯 편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대와 국가, 감독의 개성은 다르지만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782년에 출간된 프랑스의 소설 『위험한 관계』이다.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한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시대를 떠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걸까. 사실 『위험한 관계』는 재미있는 소설도, 읽기 편한 소설도 아니다. 당시 프랑스 귀족사회의 타락을 풍자했다고 하지만, 통렬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남녀의 성과 욕망을 다루고 있다고 『채털리 부인』처럼 묘사나 표현이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라고 지레짐작 해 음흉한 마음으로 접근하다가는 실망하기 십상이다.



소설 『위험한 관계』는 시작부터 끝까지 서간체로 되어 있다. 등장인물들 간에 오고 간, 무려 175통의 편지를 통해서만 사건이 흘러가고, 인물들의 관계가 얽히고, 시대의 풍속을 드러낸다. 일종의 ‘훔쳐보기’이다. 라클로가 왜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구성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성에 대해서는 유독 강한 유혹에 빠지는 인간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남녀의 사랑과 욕망의 은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을 오로지 편지를 통해서 엿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가진 ‘관음증’은 시각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관음이란 말 자체가 ‘본다’이지 ‘읽다’나 ‘듣는다’는 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소설 『위험한 관계』의 읽기를 눈앞에 생생한 모습으로 펼쳐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성과 영화, 이 둘의 결합만큼 ‘관음적’인 야합도 없다.

편지는 일종의 자기고백이다. 인물들 각자가 특정대상에게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느낌을 글로 고백한다. 소설이 이따금 서간체를 선택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독자들에게 특권과 우월의식을 준다. 편지를 읽음으로써 마치 자신이 그들의 은밀한 고백을 엿보고 있으며, 자신도 그것을 공유하게 됐다는 착각을 주려 한다. 심지어 모든 편지를 읽어볼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음으로써 독자들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모르는 사실까지도 다 알고 있는 전지적 존재가 된다. 작가가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전지적 시점보다 독자를 더욱 합법적인 관음주의자로 만들어야만 소설이 그려내는 성과 욕망이 더욱 자극적이고 흥미로울 테니까.

소설 『위험한 관계』도 그렇다. 라클로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선악, 호 불호를 내리지 않는다. 상처받은 영혼으로 교활하게 성의 욕망과 유혹을 이용해 복수를 하는 메르테유 후작부인도,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타락한 성적 게임에 빠져든 발몽 자작도, 그의 게임에 속아 육체를 버리고 자살하는 투르벨 법원장 부인도, 그들의 게임에 하나의 소도구가 되어 발몽에게 순결을 빼앗기게 된 세실 볼랑주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음모에 속은 것에 격분해 발몽을 죽이고 마는 당스니 기사까지도. (중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2년 겨울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