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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동북아대장정 동북 ... | 운영자
우리문학의 순간들_ 김지하의 「오적」과 ‘양심선언’

글 | 최재봉_한겨레 문학담당 선임기자. 1961년생
저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패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통신』 『거울나라의 작가들』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 등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 「오적」 앞부분
 
 
1970년 5월호 『사상계』에 실린 김지하의 담시 「오적」은 그로부터 10년 동안 이어질 ‘박정희와 김지하의 2인 대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시절 남북학생회담 추진과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등 학생운동에 매진하다가 옥고를 치르는 한편 역사성 짙은 서정시를 습작해 온 김지하는 반년쯤 전인 1969년 11월 시인 조태일이 발행하던 시 전문지 『시인』에 「서울길」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공식 등단한 신진 시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학생운동 시절의 동료였던 『사상계』의 김승균 편집장은 ‘동빙고동 도둑촌’으로 대표되는 부패한 사회 지도층을 비판하는 작품을 청탁했고, 김지하는 불과 사흘 만에 200자 원고지 40여 장에 이르는 장시 「오적」을 완성해 들고 왔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이렇게 시작하는 「오적」은 사회 지도층이라 할 다섯 직업군을 을사오적에 빗대 ‘다섯 도적’이라 일컬음은 물론 그 직업의 한자 표기에 의도적으로 개 견 변(犬)을 포함시킴으로써 풍자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작품의 내용인즉,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십 년이 되는 해(그러니까 5·16쿠데타로부터 10년째인 1970년)에 다섯 도적이 모여 도둑질 대회를 연다는 것.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순서로 등장해서 각자의 재주를 한껏 뽐내는데, “천원 공사 오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외상”(재벌)이라거나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될 것도 문제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 먹고 뇌물은 청해 먹고”(고급공무원) 식으로 도둑질 솜씨를 자랑하다가 결국 한꺼번에 날벼락을 맞아 급살을 한다는 것이 결말이다.

▲김지하
이런 내용 및 주제상의 특징과 함께 「오적」은 ‘담시(譚詩)’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담시는 판소리 등 전통 서사민요 형식을 차용해 역사적·사회적 이슈를 풍자적으로 다루는 비교적 긴 분량의 이야기시를 가리킨다. 김지하가 담시라는 장르를 창안하게 된 데에는 대학 시절 조동일, 심우성 등과 함께 ‘우리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판소리와 탈춤, 무속 같은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을 기른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세 권짜리 자서전 『흰 그늘의 길』을 읽다 보면 담시의 또 다른 원류를 만나게 된다.

“너는 앞으로 글을 쓸 아이다. 이 말을 잊지 마라. 사람이 글을 쓰려거든 똑 요렇게 써야 헌다. 한 놈이 백두산에서 방귀를 냅다 뀌면 또 한 놈이 한라산에서 ‘어이 쿠려’ 코를 틀어막고, 영광 법성포 앞 칠산 바다에서 조기가 펄쩍 뛰어 강릉 경포대 앞바다에 쾅 떨어진다, 요렇게!”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그에게 들려주었다는 이 말씀은 「오적」의 도입부를 떠오르게 할 뿐만 아니라 풍자와 해학, 과장 같은 담시의 기본 요소들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오적」과 담시의 연원에 관해 말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각설하고, 「오적」이 실린 《사상계》가 발행된 뒤 김지하는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고, 《사상계》 발행인은 잡지를 더 이상 시판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6월 1일치 1면 전면에 「오적」을 전재하면서 사건은 재점화되었고, 김지하는 《사상계》 발행인 등과 함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 결과 당시 한국의 대표적 지성지였던 《사상계》는 그해 9월 등록 말소처분을 받아 폐간되었고, 시인은 100일 동안 수감되어 재판을 받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1971년 4월에는 일본의 기생 관광과 경제 침탈을 비판한 「앵적가(櫻賊歌)」를 《다리》지에 발표하고, 1972년 4월에는 권력의 횡포와 민심의 동향을 풍자적으로 노래한 「비어(蜚語)」를 《창조》지에 발표하는 등 담시를 통한 현실 풍자와 정권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은 결국 1974년 4월에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고 같은 해 7월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이때 군사법정에서 그는 “현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고 진술한다.

사형 선고는 일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거니와, 이 무렵부터 일본의 동포 작가들을 필두로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 같은 세계적 지성들이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김지하 시인은 그 와중에 옥중에서 벽지를 찢어 그 뒷면에 또 다른 담시 「분씨물어(糞氏物語)」(나중에 「똥바다」로 개제)를 창작했고, 이 작품은 교도관에 의해 바깥으로 빼돌려져 일본의 진보적 잡지 《세카이(世界)》에 게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시인은 결국 복역 10개월 만인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영등포형무소를 나오는데, 이때 한 발언(“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 뭔가 이상하다”)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오적」에서 민청학련으로 이어지는 시인의 투쟁과 수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석방된 시인은 《동아일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회에 걸쳐 ‘고행…… 1974’라는 글을 발표한다. 글의 요지인즉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되어 결국 그해 4월 9일 8명의 사형으로 귀결될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이었고, 이 글이 빌미가 되어 시인은 다시 체포되고 형집행정지 처분 역시 취소된다.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75년 8월 4일 일본과 미국에서는 김지하가 그해 5월 4일 감옥에서 쓴 ‘양심선언’이 공개되어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모략이 지금 나에게 들씌워지고 있다. 박 정권의 억압자들은 나를 가톨릭에 침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공산주의 음모가로 몰아 투옥하였다. 이제 곧 나를 교활 음험한 공산주의자로 영원히 그리고 합법적으로 낙인찍기 위한 재판 놀음이 벌어질 것이며, 그 결과 나는 이 땅에 만들어진 그 숱한 관제 공산주의자의 대열에 끼이게 될 것이다.”
 

추가 혐의까지 씌워져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던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 시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김지하는 현재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라는 견해를 담은 석방요청서를 박정희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국제사회의 그 같은 여론을 철저히 무시했고, 김지하는 박정희가 수하의 총에 맞아 비명횡사하고 해가 바뀌어 5·18의 피바람이 광주를 휩쓸고 간 1980년 말까지 오랜 시간을 감옥의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때 감옥 철창 밖에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을 보면서 생명사상의 실마리를 얻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