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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_ 소설 부문- 체류와 표류

글 | 권오룡_평론가, 한국교원대학교 불어교육과 교수. 1952년생
평론집 『존재의 변명』 『애매성의 옹호』 등
정영문 장편소설『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은 『어떤 작위의 세계』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표류기라고 소개하고 있다. 누가, 혹은 무엇이 표류한 것일까? 작가인가, 소설인가?



작가에 초점을 맞출 때 표류라는 어휘는 작가의 소재와 정체성, 그리고 글쓰기의 의미를 정확하게 가리키는 지시어가 된다. 체류와 표류의 차이는 뭘까? 체류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머무는 일에 가깝다면, 어떤 흐름—그것이 물결의 흐름이든 시간의 흐름이든—에 몸을, 아니 어쩌면 마음과 생각까지 온통 내맡긴 채 부유하는 상태를 표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체류가 정착성이라면 표류는 유동성을, 체류가 튼튼하게 뿌리내림을 의미한다면 표류는 뿌리뽑힘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표류의 운명과 더불어 사람은 떠돌이로 전락하게 되고 어떤 정처나 목적지도 갖지 못한 표류의 끝에 간신히 당도하게 되는 곳은 무의미와 허무의 지점일 수밖에 없다. 체류와 표류를 나누는 경계선을 기준으로 선명하게 구획되는 세계의 구도에서 정영문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당당하게 표류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간다. 그리고는 그곳으로 호보, 히피,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종류의 떠돌이, 부랑배들을 끌어들여 동류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까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체류의 대척점에서 이 노마드들을 대표하고 있는 작가에게 정작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추문화하여 세상의 윤리적 상식에 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혁신과 발전의 실천 동력을 담보하고자 하는 진정성이다.
 
그는 다만 무기력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무기력한 삶이 사회에 대한 개인의 완전한 굴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무기력한 삶은 세상을 어떻게 해본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기까지 하다는 절대 부정과 허무의 의미적 영역 안에 함몰되어 있으면서도 이 부정성과 허무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함으로써 지탱되는 삶이다. 그러므로 이 무관심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수동성, 구속성을 폭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성을 조롱하는 부정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의 거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표류하는 것이 작가가 아니라 소설이라면? 이때 표류는 끊임없는 생각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어떤 작위의 세계』의 형식을 결정하는 핵심 인자의 구실을 한다. 표류에 무슨 정처가 있고 목적이 있고 형식이 있겠는가. 그저 둥둥 떠다니는 것일 뿐. 그래서 별 명확한 순서에 대한 고려 없이 나열된 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아주 느슨한 연결고리밖에는 지니고 있지 않아 전체적으로 『어떤 작위의 세계』는 한 편의 잘 짜인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옴니버스 소설 모음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형식 파괴의 인식론적 배경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작위의 세계』의 새로운 형식은 생각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통념—언어로 생각하는 것이라는—을 전복함으로써 획득된 전리품이다. 언어는 그 자체에 이미 문법과 형식과 규칙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생각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새털구름처럼 제멋대로이고 자유분방하고 심지어 지리멸렬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렇게 제멋대로인, 무정형적인 생각에 언어의 질서를 부여하여 의미적 유기성과 함께 소통가능성까지를 지닐 수 있도록 가다듬어낸다는 뜻일 터이지만, 이렇게 언어에 의해 갖춰지는 질서가 생각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 정영문이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은 언어의 강제적 질서가 아니라 제멋대로인 생각의 본성이다. 정영문의 생각은 언어가 아니라 몸[體]으로 겪었던, 그래서 몸에 머물러[留] 있는 이미지들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이미지들에 대해 언어는 비유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이유로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는 이미지들의 주위를 맴돌며 미끄러지는 기표(記標)들의 흐름, 즉 표류(標流)가 된다.
 
▲정영문

이 같은 이중적 의미의 표류 형식 속에 정영문은 아이러니와 페이소스와 유머 등의 다채로운 무늬를 그려 넣는다. 이 무늬들이 아마도 무기력과 무관심의 이면의 표정일 터인데, 그래서 그 무늬들은 닳아서 지워져버린 지문 같은 고통의 흔적으로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