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얼굴
내년에 탄생 100주년을 ... | 김일주
문학과미술의만남
젊은 그들 - 내가 걷는 ... | 이성부
주인공의 여로를 따라서
블룸을 따라 더블린을 걷 ... | 나희덕
대산초대석
“소설 쓰는 게 갈수록 ... | 함정임
대작 에세이
휘트먼의 시 : 사람, 자 ... | 서정인
시론
한국문학사 스토리텔링을 ... | 박덕규
대산칼럼
걸어온 20년, 걸어갈 20 ... | 곽효환
기획특집
대산문화재단 창립 20주 ... | 김종길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 | 최일남
성숙하고 품위있는 문학 ... | 김병익
한국문학을 위한 큰 축복 ... | 유재천
우리 문학의 대 사건 ... | 황동규
청렴, 무사, 공공성 ... | 김광규
대산문화재단 20년! 대를 ... | 유안진
‘문학꿈나무 기르기’와 ... | 오정희
문화국가의 이상 ... | 최원식
아름다운 청년, 대산문화 ... | 정호승
한국 집필가와 독서인의 ... | 이윤택
대산문화재단은 우리나라 ... | 김진경
세계의 귀중한 작가를 만 ... | 최인석
풍족하게 밥을 먹여주는 ... | 최재천
‘바보 재단’ ... | 김광일
벌과 나비의 어울림 같은 ... | 송찬호
세계의 문호와 지성들이 ... | 최미경
한국문단의 별장, 광화문 ... | 김수이
나를 있게한 계성원 청소 ... | 김지훈
새로운 이정표, 대산대학 ... | 윤고은
가상인터뷰
“여전히 ‘중립의 초례 ... | 강형철
나의 삶, 나의 문학
무등산 안고 돌기 ... | 문순태
나의 아버지
저 꽃도 새도, 그리고 당 ... | 반칠환
광화문글판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 ... | 전성우
나의사진첩
심양에서 열린 한중 시인 ... | 오탁번
조선동서유기
저들이 내게 유람을 권한 ... | 구지현
근대예술의 풍경
[멍텅구리], 경성 시내를 ... | 박선영
詩샘
詩 샘 - 황홀한 유폐 외 ... | 신경림
단편소설
델마와 루이스 ... | 김인숙
침묵의 미래 ... | 김애란
글밭단상
첫번째 - 억새꽃 사라진 ... | 김영남
두번째 - 눈의 전화 ... | 강신애
세번째 - 젊은 작가여 , ... | 김도언
네번째 - 나쁜 짓 , 해보 ... | 김경민
생각하는 동화
머나먼 현재에서 날아온 ... | 이명랑
대산문학상
중진 문인의 생명력과 한 ... | 전성우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시부문 - 자기 응시의 미 ... | 정과리
소설 부문- 체류와 표류 ... | 권오룡
평론 부문 - 언어 너머를 ... | 서경석
번역 부문- 전쟁의 소용 ... | 송상기
문학현장
모옌의 문학세계와 중국 ... | 박재우
개성이 없다면 공통성도 ... | 모옌
우리문학의 순간들
김지하의 「오적」과 ‘ ... | 최재봉
이 계절의 문학
문학과 정치, 쏟아지는 ... | 하현옥
원작 대 영화
욕망과 사랑의 경계는 어 ... | 이대현
우리시대의 화제작
억압적 사회의 알레고리 ... | 전철희
내 글쓰기의 선생
목 잘린 부처, 없는 길을 ... | 이원
창작 후기
다시, 몰아 읽는 일기 ... | 박성준
나의데뷔작
두 번의 등단, 두 번의 ... | 송재학
TV와 나의 근대
시골 출신 매체 변천사 ... | 최시한
명작순례
이슬람 신앙의 순애보(純 ... | 이윤재
번역후기
다정하고도 낯선 한국 여 ... | 김현자
번역서 리뷰
남북통일의 필요성을 중 ... | 손지봉
새로 나온 책
N.E.W BOOKS ... | 운영자
재단 소식
대학생동북아대장정 동북 ... | 운영자
조선동서유기_ 저들이 내게 유람을 권한 것도
도리에 위반된 것이 아니었고
내 유람도 내가 먼저 한 것은 아니었다

글 | 구지현_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1970년생
저서 『계미 통신사 사행문학 연구』 『통신사 필담창화집의 세계』 등

-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游)』
 
1876년 4월 4일 김기수(金綺秀, 1832~?)는 고종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사행길에 올랐다. 1811년 쓰시마로 마지막 통신사를 보낸 지 60여 년 만에 일본에 파견되는 사신이었다. 조정에서는 옛 외교를 다시 닦는다는 의미에서 사신 명칭을 “수신사(修信使)”로 바꾸었다. 그러나 내용은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75명밖에 되지 않는 사행원이었지만 통신사 때와 마찬가지로 화원, 서기, 중국어 통역이 포함되어 있었고, 육로에서의 행차를 대비해 악공과 기수, 고수들도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출발할 때 그의 마음가짐도 이전 사신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 1869년 2월 도쿄로 향하는 천황의 행렬. 이후 천황은 도쿄에 머물렀고 정권은 완전히 천황에게 넘어갔다.


에도 막부에 쇼군이 즉위하면 조선 조정에서는 축하사절로 통신사를 파견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일본은 더 이상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에서 외교를 회복하자는 연락을 해 온 적이 있었으나 사용한 용어가 예전 격식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은 1868년 막부의 쇼군이 물러나고 천황이 실권을 잡게 된 일도, 천황이 에도에 입성하여 이름을 도쿄로 바꾼 사실도, 서양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개혁을 단행한 일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875년 강화도를 침범하는 운양호 사건을 그린 그림


그런데 더 이상 일본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875년 일본은 운양호를 이끌고 강화도에 접근해 공공연히 위협 침공을 감행하여 결국 우리 군대와의 충돌을 유도해 냈던 것이다.
 
이를 빌미로 1876년에 조선은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던 한일수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때 조약을 지휘했던 일본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는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일본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고 양국의 옛 우호를 회복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일본의 개화문명을 직접 경험하게 하여 앞으로 있을 한일통상장정의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 함대를 보내 위협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고 자기 나라에 초대하여 시찰하게 함으로써 무역에 관한 규약을 맺게 하는 과정은 불과 20년 전 일본이 미국에게 그대로 겪었던 과정이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조선인에게 일본의 근대적인 모습을 구경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셈이다.

▲1876년 강화도 연무정에서 수호조규를 체결하고 있는 모습

 

조선 사신, 화륜선을 타다

4월 27일 김기수 일행은 부산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29일 부산포를 출발하였다. 그들이 탄 일본 배 황룡호(黃龍號)는 바람이나 사공의 힘이 아닌 증기의 힘으로 가는 화륜선(火輪船)이었다.

 
다른 배는 바닥이 물에 평평하게 닿아서 물이 깊고 바람이 순조로우면 돛을 올리고 가지만 이 배는 칼이 물건을 자르는 것처럼 물을 베면서 달린다. 태풍만 없으면 바람이 불어도 안 불어도 움직이는데, 배의 힘이 전적으로 석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석탄을 태우면 기계 바퀴가 저절로 돌아가고 배는 나는 듯 달리게 된다.

                                                                           - 『일동기유』 1권 「승선」

 
배 안에는 선실이 있고 선실 안에는 2층 침대와 세면대에서 시계까지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사람은 잠을 자도 배는 멈추지 않고 달리니, 다음날인 5월 1일 아침 어느새 시모노세키에 닿아 있었다. 4일에 고베에 도착해 잠시 내려서 쉬고, 7일에는 요코하마에 도착해 하선하였다. 예전 같으면 서너 달 걸리던 길을 단 일주일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바닷길의 안녕을 비는 해신제도, 사람을 물리치기 위한 풍악 연주도 필요 없는 여정이었다. 그가 만난 일본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낯선 것들로 가득해 있었다.

김기수 일행은 요코하마 역으로 안내되었다. 차를 타고 간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기다란 행랑만이 있을 뿐 차를 찾을 수 없었다. 차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그 기다란 행랑이 바로 차라고 하였다. 기차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도쿄의 신바시까지 이동하였다.

▲영국 신문에 실린 김기수 일행의 모습

 
서양식으로 넘쳐나는 일본

5월 10일 아카사카 궁에서 천황을 접견하였고, 12일에는 메이지 정부의 최고 지위에 있던 산조 사네토미의 주관 하에 바다를 건너온 사신을 환영하는 하선연이 열렸다. 장소는 사신이 묵는 엔료칸이었다. 엔료칸은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여기에서 베푼 연회도 서양식이었다.
 
▲엔료칸에 있는 김기수의 모습. 엔료칸은 하마 이궁 안에 있던 영빈관이었다.

각 사람들 앞에는 각기 두 개의 접시가 놓여 있었다. 접시 위에 흰 천위에 떡이 있었으니, 천은 흘리는 것을 받치기 위한 것이고 떡은 음식에 곁들이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접시는 비어있었고 접시 왼쪽에 대·중·소 세 개의 숟가락이 있었다. 숟가락에는 이가 있어서 집을 수도 있고 찍을 수도 있었다. 오른 쪽에는 칼 두 개, 숟가락 두 개가 있었는데 각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다. 가져오는 음식은 단단한 것, 무른 것, 국, 자른 고기 조금씩이었다. 단단한 것과 자른 고기는 이가 있는 숟가락으로 눌러서 칼로 자르고, 무른 것과 국은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한 번 쓴 숟가락과 칼을 접시에 두면 시종이 접시를 가져가서 깨끗하게 씻은 것으로 가져오고 칼과 숟가락도 제 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음식을 내왔다.

                                                                             - 『일동기유』 2권 「연음」

 
흰 천이라고 한 것은 냅킨, 떡이라고 한 것은 빵, 이가 있는 숟가락은 포크였을 것이다. 스프와 스테이크 같은 서양식 음식이 제공되었고, 술도 와인이 서빙 되었다. 이때 연주되었던 음악도 서양의 음악이라 하였다. 일본인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김기수가 본 일본인들은 거리낌 없이 쇠고기를 먹을 뿐 아니라 근력을 좋게 하려면 꼭 쇠고기를 먹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입은 옷도 모두 서양식이었다. 연회에 입고 온 옷은 공복이라고 하는데, 바지는 착 달라붙어서 앞뒤로 음경과 엉덩이가 두드러져 나올 정도였고, 검은 가죽신은 중국 여자의 전족처럼 꽉 끼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인사도 모자를 벗고 가벼이 목을 숙이는 방식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일본 관료 모리야마 시게루는 김기수에게 편리한 기계나 제도를 구경하라고 권유하였다. “훌륭한 군사제도를 살펴서 개혁하고, 편리한 기계를 관찰해서 모방하고, 채용할 만한 풍속을 탐색해서 도입하여” 돌아가서 조선 내에 여론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김기수는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유람하여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고 사양하였다. 
▲ 김기수가 도쿄의 우치다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김기수가 도쿄에 도착한 날,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행렬을 보기 위해 거리에 빼곡하게 모여들었다. 이들의 의복과 풍속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일본인들이 지나치게 비웃어서, 그 작태를 비판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런 일본인을 관찰한 영국 기자는 “일본인들은 자기들도 최근까지 그 손님들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 불쌍한 조선 사절을 보고 절제 없이 웃었다. 이 조선 사절은 중국인풍의 잘 생긴 얼굴을 한 사람들이다”라고 일본인을 조소하는 기사를 썼다. 불과 십여 년 사이에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글과 그림에 열광하던 과거를 잊고 먼저 문명개화되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조선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력거를 탄 김기수 일행의 모습

김기수는 일본인이 “성격이 조급하고 마음이 물러서 중후하고 느린 사람을 보면 꾸짖고 용납을 못하여 스스로 견디지를 못한다”라고 비판하였다. 빠르게 모방한 근대 문물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의 지나친 조급함. 김기수가 그들의 성과조차 미덥지 않게 여긴 것은 이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김기수는 20일 정도 도쿄에 머물렀다. 첫날 통역이 목패 몇 십 개를 주며 하인들에게 주어  관소를 드나들 때 표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날까지 그냥 놓아두어서, 목패의 글씨를 못 알아볼 정도로 먼지가 쌓였다고 한다. 일본을 정탐할 기회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행을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 운행하는 기차를 그린 판화

이국의 풍속을 기록한 『일동기유』

자세히 보지 않았다고 근대 문명의 충격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증기기관으로 동력을 일으키는 무기 공장을 견학한 그는 “한 개의 화륜으로 천하의 능사를 다 만들어내니 기교가 이럴 수 있는가!”라고 감탄하였다.

예전에는 내게 유람을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옳았고 유람하라고 한 사람이 옳지 않았으나 내가 옳은 것을 따르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나의 유람은 옳지 못한 것인가? 기묘한 기술이 이용후생을 할 수 있고 이용후생은 배워야 하는 것이니 살펴보았을 뿐인 나의 유람은 옳은 것인가? 다만 나는 저들이 내게 유람을 권한 것도 도리에 위반된 것이 아니었고 내 유람도 내가 먼저 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 『일동기유』 4권 「부관육군성정조국기」

서양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끝내 떨쳐 버릴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마음 한 구석 근대 기술을 배워야 할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적극적인 관찰은 아니었지만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통해 당시 일본의 모습은 그의 사행록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 그대로 남아있다. 어쨌든 “이국의 기이한 풍속”을 성실히 기록해 두던 통신사의 전통이 이어져, 현재까지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