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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_ 저 꽃도 새도,
그리고 당신도 내 아버지의 유산

글 | 반칠환_시인. 1964년생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저서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뉘도 모를 한때』 『꽃술 지렛대』 등

 
아버지 1
 
풍으로 떨던 아버지, 나 하나도 슬프지 않았네
내 나이 다섯 살, 지팡이 짚은 아버지 허리춤 풀어 주며
오줌 시중들어도 나 하나도 가엾지 않았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는 사람, 아버지는 그저 방 안에 있는 사람
이따금 콜록거리는 기침과 긴 한숨이 문턱을 넘어왔지만, 나 무시했네
나를 사로잡은 건 그보다 능구렁이나, 다람쥐 울음소리였다네
어느 날 아버지, 잠자리 꼬리 밀짚 꿰어 시집보내던 나를 불렀네
막내야, 산내끼 좀 가져다 다오-
고무신 꿴 아버지 댓돌 아래 나오시네
아부지, 산내끼 여기
가까스로 헛간으로 오신 아버지, 새끼줄로 목을 매시네
나 말리지 않았네
발버둥치던 아버지, 새끼줄이 끊어지자 청뜰에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네
나, 그제서야 앙 하고 울었네
아버지는 그 후로 일 년을 더 사셨네

 
 
 
첫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에 실렸던 아버지 연작 가운데 그 첫 번째 시이다. 중풍으로 자리보전하던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동짓달 초나흗날 온가족이 둘러앉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던 모습은 아직도 선연하다. 형제들이 돌아가며 숟가락으로 숭늉을 떠 넣으며 부르던 ‘아버지’ 소리가 아직도 귓바퀴에 남아 있다. 나도 고사리 손으로 숭늉을 넣어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태 전에는 바로 그 아랫목에서 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전 재산과 거처를 잃고 병이 든 큰아버지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둘째 형의 등에 업혀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산골 오두막으로 오셨다. 큰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어 베수건으로 즙을 짜내어 큰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곤 했다. 나는 즙이 빠져나가 푸석거리는 사과 건더기를 받아먹느라 노랑 강아지 지름떡 바라듯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 기다리곤 했다.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어린 것이 한 번도 사과 한 조각 달라고 떼쓰지 않았다며 두고두고 칭찬을 하셨다. 감나무에서 주발만한 대봉 홍시가 떨어지면 두 손으로 주워들고 큰어머니께 먼저 드렸다. 큰 아버지 산소는 늘 고구마를 심던 밭 위에 모셨다. 큰 아버지의 음덕인지 해마다 고구마가 붉고 굵었다. 밭에 갈 때마다 큰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렸다.

구 남매 중 막내인 나는 형제들과 나이 차가 많다. 전후 베이비 붐 세대의 대개가 그렇듯 바로 손 위 다섯 살 많은 누나부터 스무 살 많은 큰 형까지 터울이 많은 형제를 두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배움의 길이 막힌 형들은 채 뼈도 굳지 않은 어린 나이에 대처로 나갔다. 저마다 식당에서 일하며 공부했고, 농약사에서 일하며 공부했다. 어머니는 농사짓고 품앗이하러 다니느라 온몸이 갈퀴였고 도리깨였다. 바로 위의 형과 누나가 학교 가고 나면 취학 이전의 어린 나는 아버지와 가장 긴 해를 보냈다. 이정골에서 떠오른 태양은 마당에 처마 그림자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당겼다 되놓으며 중고개로 사라졌다. 처마 그림자가 밭아지고 먼 데서 오정 부는 소리가 들리면 ‘아부지’와 식은 밥을 먹었다.

기침소리, 누런 오줌 줄기, 병색으로 주름 깊은 아버지는 해 떨어질 때까지 내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집은 외딴집이고 나는 말을 나눌 사람 친구가 없었다. 병아리와 강아지와 다람쥐와 개구리와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송아지에 얕잡혀 뜸베질을 당하거나 발등을 밟혀 절룩이며 걷기도 했다. 엄마와 형제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저녁 으스름이면 왼 귀는 적막에 내어 주고, 오른 귀는 고요를 세 들였다. 나는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까지 알아들었다. 분꽃이 접은 우산을 펴고 박꽃이 부푸는 소리까지도 들은 듯하다. 교육학자들에 따르면 유년기는 인생 초기 단계의 경험이 이후 모든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시기’라고 한다. 나는 새순 같은 시기에 병과 죽음과 적막에 대해 충실한 조기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내 무의식의 깊은 바탕화면이 되었을 것이다.

머리숱이 많고, 눈썹이 검고, 인물 좋던 아버지는 솜씨 좋은 목수였고, 이야기책을 구수하게 읽어 동네 사람들이 겨울밤을 도우러 집으로 몰려오고, 마을에 상여가 나갈 때면 상두꾼들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구성지게 상여가를 부르던 선소리 상두꾼이었다고 나보다 일찍 머리 굵었던 형제들은 말한다. 하지만 오십 줄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의 몸에서 태어난 나로선 알지 못하는 일이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나는 반 씨라는 성과 가난의 진수성찬을 물려받았다. 내 출생신고는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큰 형님이 하셨다니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는 기이한 유복자인 셈이다.

죄송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결핍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찍이 큰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내 나이는 네 살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열 손가락에 불을 지펴 하늘로 올라 가야겠다’고 하셨을 때는 두 눈 빛내며 언제 올라가실 거냐고 묻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수런거리는 게 반가웠고, 아주머니들이 솥뚜껑에 부치는 부침개에 손을 내밀며 군침을 삼켰다. 마당에 지핀 화톳불에서는 불티가 함박눈을 데리고 장엄하게 솟구쳤다. 아버지는 분명 장작개비 같은 열 손가락에 불을 지펴서 하늘로 올라가고 계셨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5남매. 맨 왼쪽 큰형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필자

아버지는 가부장제가 구축해온 ‘아버지’와 관련한 어떠한 상징도 막내아들에게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내게는 ‘아버지적인’ 어떤 것도 형성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대마디 같은 손, 솔거죽 같은 발꿈치, 지게 진 뒷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인화된 어머니의 사진에는 늘 아버지의 모습이 합성되어 있다. 내게 어머니는 또한 아버지였다. 나는 지금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차이, 지아비와 지어미의 역할의 차이에 대해 잘 알지 못 하고 익숙하지 않다. 나는 남성적이며 여성적이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다. 청소년기의 나는 내 아버지의 부재가 슬픈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둔 친구들의 불운(?)을 걱정했다. 나는 그들의 아버지를 ‘호통’과 ‘손찌검’과 ‘권위’와 ‘억압’과 ‘음험함’과 동의어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때때로 그들과 같은 아버지가 없음에 안도하곤 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구 같고, 스승 같은 아버지’가 있을 거라고는 애써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내 무의식이 지어 낸 ‘신포도’였을까? 아버지의 상실을 상실로 여기지 못하고 성장한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부재’가 내게 끼친 강력한 상흔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아비 없이 자란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또 있었다. 그 아버지는 봄날의 달디 단 유채꽃 대궁으로 왔고, 여름날 시원한 참외로 왔으며, 가을날 우박 같은 도토리로 왔고, 겨울날 보리항아리 속 붉디붉은 연시로 왔다. 아버지는 늘 충만했다. 나는 아버지의 가슴을 밟고 산으로 들로 달려갔다. 봄 들판에는 진달래와 나물들이 지천이었고, 여름 뒷산에는 버섯들이 발에 채였다. 달걀버섯, 꾀꼬리버섯, 오이꽃버섯, 갓버섯, 기와버섯, 연지버섯, 싸리버섯을 소쿠리에 담아왔다. 가을이면 떡메로 도토리를 털었고, 겨울엔 뽕나무 구부려 만든 덫에 새들이 걸려들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이라는 이름의 나의 아버지는 네 페이지로 된 동화책이자, 시집이자, 소설이자, 경전이었다.

어떤 이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하였으나, 나를 키운 건 8할이 숲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주사기로 내 피를 뽑으면 푸른 수액일 나올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번번이 붉은 혈액이 나와 실망하지만 나를 키워준 숲이 내 안에 있음을 의심한 적은 없다. 저 네 페이지짜리 아버지를 외딴집 등잔불 아래서 스물두 번이나 읽고 내가 깨달은 것은 자연의 재활용 정신이었다. 나는 보았다, 큰아버지는 죽어서 고사리가 되고, 아버지는 죽어서 쑥부쟁이가 된 것을. 나는 보았다, 잎은 져서 거름이 되고, 똥거름이 솟아 무가 되는 것을. 늘 두엄은 남김없이 꽃이 되고 꽃은 어김없이 두엄이 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다. 내 육신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세계를 남겨 놓았다. 저 꽃도, 새도, 당신도 내 아버지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