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비교적 말씀이 적은 분이셨다. 그러나 저녁에는 항상 약주를 조금 드시고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곤 하셨다. 집안에 내려오는 구전들, 또 집안 내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말씀해 주시곤 하셨던 것이다. 어린 시절 고종 황제를 뵙고 두루마리 필지를 상금으로 받아 오신 것을 보여 주기도 하셨다.
당시 아버님이 사시던 곳은 종로구 화동 137번지. 재동국민학교가 인접해 있어서 가끔 뒷동산에 놀러가서는 학생들 공부하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6살 때 혼자서 학교를 찾아 갔단다. “학교를 넣어주세요” 하는 6살 어린애를 학교에서는 귀엽게 보고 이것 저것 읽혀 본 후 “나이가 너무 어리니 내년에 오거라” 했다고 한다. 다음 해 다시 가서 금년에 넣어 준다고 하였다고 하고서야 7살에 초등학교 입학이 가능하였는데 보통 10살에서 15살이 동기생이었다고 한다.
집 뜰에서 화초를 즐겨 키우셨고 많은 시간을 서재에서 보내셨다. 하지만 언제라도 서재에 들어가 아버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집안에서의 이야기 중 많은 경우는 유머가 조금씩 곁들인 것들이어서 아버님과 농담도 나눌 수 있었고, 진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가 있던 시절. 저녁 후에는 남부민동의 등대까지 산보를 나가곤 하셨다. 그러면 어머님께 가서 아버님 지갑을 달라고 하여 필자와 누이는 멀리서 뒤따라갔다. 우리들만 돌아가라고 하시기에는 좀 멀다고 생각될 때에 “아버지” 하고 뛰어간다. 그래야 돌아오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려서 과자를 사 달라고 떼를 부릴 수가 있었다.
대학을 진학할 무렵, 무엇을 전공할까를 상담하였다. “글쎄. 네가 정해라. 법학은 내가 해보니 재미가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은 하지 않아도 공부는 한 번 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답변을 해주셨다. 연고전이 있을 때는 집안에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아버님은 열심히 고려대학을 응원하시고 필자는 연세대학을 응원하는 등 집안에서도 뜨거운 응원 열기가 있었다. 한 번은 레코드 가게에 가서 “순이 순이” 하는 노래를 사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아마도 밖에서 듣고 좋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레코드 상점에 가서 물으니 ‘산 너머 저 마을의 순이’라는 노래가 새로 나왔다기에 사다 드렸다. 노래를 잘 하지는 못하셨지만 즐겨 들으시고 때로는 열심히 따라 부르기도 하셨다.
필자가 처음 술을 배울 때도 아버님 앞에 술잔을 들고 가서 아버님께서 드시는 술을 조금 따라서 마시곤 하였다. “옛날에는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몸이 흐트러지거나 도포 자락이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고 하셨다. 정당에 들어 가셔서는 비교적 약주를 많이 하셨다. 처음 정당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함께 술을 드셨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거실로 나와 쉬시면서 “어유 무슨 술들이 그렇게 센지. 내 술 실력을 실험하느라고 경쟁을 하는데 이곳이 우리 집이었으니 내가 이겼지 다른 곳이었으면 도저히 못 당했어” 하셨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 계시던 형님께 다녀오셔서는 “그녀석이 언제 그렇게 술이 세졌는지, 내가 견디다 견디다 그만 지고 말았다”고 하셨다.
금년에는 아버님 탄생 100주년이 되어 고맙게도 고려대학교 교우회가 중심이 되어 아버님 묘소 앞에 추도비를 세우고 문학가, 법학자, 정치가,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기리게 되었다. 일상 생활에서 항상 접하던 아버님의 이러한 기억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사회에서의 활동이 집안에서 그대로 이어져서 때로는 글씨도 써 주시고 화초를 가꾸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시던 분, 누이와 필자를 앉혀 놓고 천자문을 직접 가르쳐 주셨고, 법학에 대해서도 정치에 대해서도 함께 토론을 할 수 있었던 아버님이셨다. 화초 가꾸기를 즐기셨고,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와도 정겹게 인사를 나누시던 아버님, 때로는 회초리를 들 만큼 엄하셨고 때로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실 만큼 자상하셨고, 시대상황에 대한 해설을 해 주셨고 항상 내 문제에 대한 의논의 상대가 돼 주셨던 기억이 필자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 되어져 있다.
사회에서는 많은 활동을 하셨지만 가정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필자의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셨던 자랑스러운 아버님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이제부터는 네가 우리 집안을 이끌어야 된다”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새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