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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문학의 상흔을 딛고 개인을 발견하다- 한국소설을 들어 올린 60년대의 두 봉우리, 김승옥과 이청준

글 / 이근배_시인. 1940년생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노래여 노래여』『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시조집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장편서사시 『한강』, 기행문집 『시가 있는 국토기행』 등

마침내 모국어의 한 시대를 여는 새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오랜 역사 동안 한문자에 갇혀 진정한 내 나랏말씀을 글로 적어오지 못했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얼어붙은 땅을 뚫고 밀어 올리던 모국어 문학은 갑자기 불어 닥친 일제의 강점으로 모진 억압과 핍박으로 꺾이는 듯 했으나 그 생명력은 더욱 거세게 불을 피웠었다.

광복을 맞고서도, 분단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땅의 시인, 작가들은 그 아픈 담금질을 글쓰기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의 아침이 오고 있었다. 4․19가 역사적 필연성과 당위성을 가진 것이라면 이른바 4․19세대가 잉태해서 분출시킨 문학 또한 그만큼의 잠재력과 폭발력을 동반한 것이었다.

4․19의 기운이 용틀임하던 1960년 3월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에 첫 발을 내딛은 까까머리들이 있었다. 불문과에 김승옥 김현 김치수, 독문과에 염무웅 이청준 김주연 김광규, 영문과에 박태순 정규웅 한 해 뒤 불문과에 김화영, 국문과에 오세영이 입학했다.

1학년 1학기 문리대 B반 교양과목 수업은 불, 독, 영 3과가 한 교실에서 있었다. 과만 다를 뿐 같은 반이었고 문학과목 강의는 “우상의 파괴”로 일약 문명을 떨치고 김동리와의 논쟁으로 문학평론의 바람을 일으킨 이어령 교수가 맡았다.

지금 대학로라고 이름 붙여진 동숭동 캠퍼스와 학림다방 주변은 60학번에게 있어 글쓰기의 충전소였고 4․19에 이은 5․16 등 격변하는 시대와의 싸움터였다. 우연이 아니게도 김승옥, 이청준 등 소설쓰기와 글쓰기를 겨냥하고 있는 9인의 문학도들이 국문과를 외면하고 외국문학을 지망한 것부터가 글쓰기의 새로운 흐름이 의식의 깊은 골짜기에서 샘솟고 있었던 것이다.

이숭령 교수는 국문과 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은 서라벌 문예창작과에나 맡기고 서울대 국문과는 학문을 해야 한다”고 이르고 있던 터였다. 이태준, 정지용이 비운 자리를 채운 김동리, 서정주는 서라벌대에서, 황순원은 경희대에서, 조지훈은 고려대에서 후학들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문학사의 물길이 60년대에 들어서 새롭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소설로는 최인훈의 『광장』이 4․19 기류를 틈타서 남북분단의 아킬레스건을 날카롭게 수술해 냈고 시는 김수영, 신동문 등에 의해 사회적 함성을 뜨겁게 응축하고 있었다.

동숭동 캠퍼스 60학번에서 맨 처음 폭죽을 터뜨린 것은 김승옥이었다. 1962년 1월1일자 한국일보 신춘문예 발표에서 김승옥의 「생명연습」이 소설부문에 당선한 것은 하나의 예고였다. 순천에서 초, 중, 고를 다닐 때부터 책읽기와 글쓰기에 남달리 매달려온 그는 발레리, 랭보, 보들레르의 시와 프로벨, 모파상이 있는 불문과를 택했지만 아마 서울대에 러시아문학과가 있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푸슈킨, 에세닌이 있는 그쪽을 더 선호했으리라.

김승옥은 당선하자마자 같은 해 <자유문학>에 평론 「나르시스시론」으로 등단한 김현, 그리고 최하림, 김화영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여 「건(乾)」,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한국소설의 새 모델을 보이더니 잇따라 「역사(力士)」(64.7 문학춘추), 「무진기행」(64.10 사상계) 등으로 자리를 굳히고 「서울 1964년 겨울」(65.6 사상계)로 제 10회 동인문학상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당시 동인문학상은 국내의 유일하고도 최고인 소설문학상으로 폭발적으로 읽히던 종합교양지 <사상계>가 제정, 신예 중견작가에게 주어지고 있었다. 김승옥, 김현의 뒤를 이어 김화영(63. 조선신춘문예, 시 「육성」), 염무웅(64. 경향신춘문예, 평론 「최인훈론」)이 나오더니 이청준(65.12 사상계, 소설 「퇴원」)이 또 하나의 봉우리를 세우며 솟아올랐다. 김주연(65.12 세대, 평론 「소설을 재미없게 하는 것」), 김치수(66. 중앙신춘문예, 평론 「자연주의 양고(兩考)」) 그리고 좀 떨어져서 정규웅(74. 11 한국문학, 평론 「구미의 여성문학론」), 김광규(75.5 문학과지성, 시 「유무(有無)」등으로 동숭동 60세대의 화려하고도 막강한 진용은 완결되었다.

특히 김승옥과 이청준의 등장은 김동리, 황순원 이후 손창섭, 박경리. 이호철, 서기원, 선우휘, 송병수 등 50년대 작가 군이 보여주었던 한국적 소설의 틀을 깨고 감각적이고 감성적 문체로 보다 치밀하게 시대상과 인간상을 그려냄으로써 한국소설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김승옥의 기세는 충천하고 있었다. 「다산성(多産性)」(65.12 창작과비평), 「염소는 힘이세다」(66. 자유공론), 「내가 훔친 여름」(중앙일보) 등으로 치닫더니 「무진기행」이 「안개」로 영화화 되는 등 소설가 김승옥은 문화예술계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다. 급기야는 김동인의 「감자」의 메가폰을 잡는 영화감독까지 하면서, 그처럼 승승장구하던 김승옥의 글쓰기 시스템에 이상이 걸렸다. 너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온 스포트라이트를 의식했던 것일까. 기독교에 몰입하는 일이야 글쓰기에 저해될 것이 없겠거늘 소설 발표가 뜸해지더니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서울의 달빛 0장」(77.7 문학사상) 이후 한두 편을 내놓고는 무슨 까닭인지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다. 거기다 몇 해 전부터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말과 글이 잘 풀리지 않아, 거의 동시대에 등단하여 40여년토록 젊음을 탕진하기도 하며 “너는 소설 나는 시”하면서 따뜻한 경쟁을 벌였던 나는 마음 한쪽이 비어있다.

이청준은 누구인가. 소설읽기를 게을리 하는 나로서도 동시대 작가로 이청준 소설만은 열심히 읽었다. 그 까닭으로 1976년 김동리 선생이 하시던 <한국문학>을 물려받아 6월 혁신창간호를 만들면서 나는 먼저 이청준을 떠올렸고 그의 중편 「황홀한 실종」 3백50장을 앞머리에 실었다. 그리고 「치자꽃 향기」(76.12), 「춤추는 사제(司祭)」(77.1)와 다시 권두중편 「잔인한 도시」(78.7)를 실을 만큼 나는 이청준 마니아였고 편애하고 있었다. 「잔인한 도시」는 김승옥에 이어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제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종합문예지의 꽃은 소설일 수밖에 없다. 원고료도 넉넉지 않은데 그래도 이청준에게 전화를 했다. “소설 안 써줘?” “원고료 많이 준다는 데가 있어 한 편 썼는데 갖다 실을 테면 실어!” 나는 염치불구하고 받아 실었다. <한국문학> 79년 8월호의 「살아있는 늪」으로 그는 중앙문예대상 예술부문상을 수상했다. 나는 “그것 봐 마음을 잘 쓰니 상을 타지?” 했으나 전업작가가 원고료를 반 밖에 못주는 잡지에 선뜻 원고를 내주는 일은 그가 아니면 없는 일이었다.

두 해전 여름 나는 계간지 <문학의문학>을 창간하면서도 먼저 이청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영이라고 거역하겠어 써봐야지!” 어찌 그에게 원고청탁이 밀려있지 않았으랴만 그 대답만으로도 나에게는 백만 원군이었다. 그런데 원고약속이라면 어기지 않던 그가 마감을 며칠 앞두고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병원에 가거든.” “뭐 병원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와서 써줘.” “아냐 나도 언제 나올지 물러.” 속으로 예삿일이 아니라 싶었지만 창간호보다도 묻지도 못한 병세가 걱정되었다. 소설은 안 되나 싶었는데 전화가 왔다. “초고 비슷한 걸 썼는데 갖다 실어. 이게 마지막 작품일지도 물러.” 나는 눈물이 날만큼 기뻤다. 창간호에 이청준 소설을 싣는다는 것과 그의 병세가 그리 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러나 그는 마지막 작품을 내게 주고 지난 해 7월 31일 붓을 놓고 떠났다.

제13회 동인문학상에서부터 제17회 호암상 예술상까지 그는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의 소설은 「서편제」, 「천년학」, 「밀양」 등으로 영화화 되어 한국영화의 한 획을 긋는 데도 기여했다. 나는 김승옥과 이청준 저 60년대에 치솟아 올랐던 한국소설의 큰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며 그들과 더불어 문학이라는 좁은 마당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살아왔음이 더없는 자랑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