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십여 년 전에 시인 김선굉 형이 ‘장형, 우리 이제 쉰을 넘겼으니 춤 춰도 된다. 춤 배우러 안 갈래?’ 농을 걸어온 적 있다. 그때 내 말이 ‘난 이십대 초반에 이미 다 뗐기 때문에 더 배울 게 없소’라는 것이었다. 비록 한 달도 못 채웠지만, 그때 나는 지르박, 브루스, 탱 고, 폴카, 왈츠 등을 춤바람 나 이혼 당한 스승님 단칸 셋방에서 카 세트테이프 음악에 맞춰 열심히 무공을 익혔다. 하루는 퇴근길 버 스에서 ‘뽕짝’ 노래가 흘러나와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내 두 발이 의자 밑에서 저절로 돌아가는 거라.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때 나 는 알았다, 몸은 몸의 길이 있고, 마음은 마음의 길이 따로 있다는 걸. 한창 피 끓던 시기여서 잘못하다가는 패가망신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날로 춤 배우는 일을 깨끗이 접었다.
생각해보면 제비의 운명은 내 이름 석 자에 들어 있었던 게 아닌 가 싶다. ‘장옥관’이라는 이름. ‘장’자는 ‘동백장’ 할 때의 ‘여관 장’자 이고, ‘옥’자는 ‘취루옥’ 따위 ‘술집 옥’자이며, ‘관’자는 ‘명월관’의 ‘청루 관’자이다. 한마디로 화류계로 나가야 할 운명이라. 하지만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는 한미 하나마 선비로 자처하던 분이어서 함부로 작명하실 분이 아니다. 양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이름 의 내력을 일러줄 사람이 없던 터라 나이 들어서야 내 이름의 속뜻을 짐작해 보았다. 한자로 바 꿔 이름을 풀이하자면, ‘베풀 장(張)’, ‘기름질 옥(沃)’, ‘보습 관(錧)’이다. ‘보습’이라는 훈이 다소 생소한데 이는 쟁기 날을 뜻한다. 다시 말해, ‘너는 박토의 재능을 타고 났으니 열심히 쟁기질 해 네 삶을 옥토로 바꾸고, 게서 좁쌀 서너 줌이라도 나오면 아낌없이 남들에게 베풀어라’라는 뜻. 이 할아버지의 유훈을 짐작하거니와 어찌 내 멋대로 제비의 삶을 살 수 있으랴. 내 시업(詩業)의 운명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학창시절 문우들이 다 이십대에 등단했는데 나 혼자만 삼십대 초반에야 문단에 이름을 올렸고, 등단 30년에 겨우 시집 다섯 권을 펴냈으니 나의 재능 없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 그나마 환력을 넘긴 지금까지 펜을 놓지 않는 것 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형편이다. 이 굼뜬 시적 이력이야말로 쟁기를 짊어진 밭갈이 일소의 발 걸음이 아닌가.
내 본관은 인동이다. 인동에서 산 하나를 넘은 곳, 경북 선산군 장천면에서 나는 태어났다. 인동과 장천 경계에 천생산이 있다. 우리 마을에선 그 산을 ‘반티산’이라고 불렀다. 반티는 경상 도 방언이고 표준말은 함지. 산봉우리가 칼로 베어낸 듯 평평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런 형상의 산을 국내에선 본 적이 없다. 듣자하니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고향에 흡사한 산이 있 다고 한다. 나는 그 반티산을 내 시의 탯줄을 묻은 곳으로 여기고 있다. 유년시절 그 반티산을 보면서 산 너머 세계를 꿈꾸며 낭만의 서정을 익혔고, 어른이 되어 고향 반대편 반티산 아래에 서 직장 생활을 하며 등단의 꿈을 이루었다.
그 반티산 자락에 구미공단이 자리 잡고 있다. 구미는 70년대와 80년대 우리 사회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곳. 전통사회가 근대라는 미명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는 걸 보는 건 참담 한 일이었다. 인동이라는 곳, 내 본관인 그 유서 깊은 고장이 공단 개발에 의해 하루아침에 뿌 리째 뽑히고 만 것이다. 땅값이 오르는 바람에 종가 재산을 둘러싸고 종친들이 얼굴 붉히는 남 사스러운 장면을 보았고, 기와집 즐비했던 마을에 안마시술소, 노래방이 들어서는 것도 지켜보 았다. 등단 초기에 펴낸 두 권의 시집에 담긴 전통지향적인 성격과 현실지향적인 성격은 여기에 서 기인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시적 이력에 하나의 전기를 가져온 것은 정년 이십여 년을 앞두고 감행한 명예퇴직이다. 사람들은 이른 승진에 공기업이라는 그 좋은 조건을 왜 박차고 나가려 하느냐고 입 모아 만류했다. 실제로 나도 그 말의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기 어려웠다. 아예 가능 성을 없애기 위해 예상 퇴직금으로 부동산을 계약해버렸다. 잔금이 없어서라도 퇴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명예퇴직한 후 일이 년 동안은 아주 좋았다. 쓰고 싶은 글 쓰고 읽고 싶은 글 읽는 생활이었 다. 하지만 방심 탓일까, 건강에 문제가 생겨 몇 개월 동안 실어증을 앓았다. 게다가 우울증까 지 겹쳐 때론 아파트 유리창을 박차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곧이어 아내에게도 중 병이 찾아왔다. 내가 아플 때보다 아내가 아픈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불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돌파구로 찾은 게 ‘프로이드 라캉 세미나’에 동참한 일이었 다. 그 공부를 하면서 내가 깨달은 건 아내의 병에 어머니의 죽음이 겹쳐있었다는 사실이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팔 년 뒤에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어린 두 동생들과 살아갈 일이 막 막했다. 하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현실을 도저

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심리적 외상의자가 치유법이 기억을 봉인하는 일이었다. 아내의 병으로 그 자물쇠가 벗겨져 그렇게나 나를 힘들게 한 것이다. 이 일련의 경험은 내 시에 병과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다.
또 하나의 시적 전환이 있다면 늦은 대학원 공부를 들 수 있다. 그 과 정을 통해 나는 우리 시의 통시적 흐름을 살필 수 있었다. 더불어 시 이 론에 대한 나름의 자각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그 과정이 없었다면 내 시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의식화 과정 없이 무반성적으로 흘러갔을 것 이다. 비록 본격적인 이론 탐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시를 대상으로 한 창작방법 연구는 그 이전에 써왔던 내 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가져 왔다. 문어체를 버리고 구어체를 사용한다거나, 시·청각 위주의 원격 이 미지 대신에 몸에 근접해 있는 이미지를 구사하며, 시적 대상을 초월적 세계보다는 일상에서 찾는 일, 현실과 초월에 대한 경계 지우기 등이 내가 지향해야 할 시적 방향이었다. 이런 과정 을 통해 개성이랄까, 나만의 독자적인 영역에 대한 암중모색이 이루어졌다.
이삼 년 전인가, 예전에 춤 공부를 권유했던 김선굉 형이 하루는 내 고향 물려받은 대엿 마지 기 땅에 목백일홍을 심자고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목백일홍이라니, 덕망 높은 선비의 서원에나 심는다는 그 나무가 아닌가. 그걸 내 논에 심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붉은 구름이 뒤덮인 논이 당장 눈앞에 떠올랐다. 수백 년 쌀농사를 지어온 땅을 뒤엎고 나무를 심는다는 게 좀 꺼림직 했 지만, 유혹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 일말의 양심을 담아 시 한 편을 빚었으니 「무논에 백일 홍을 심다」란 작품이다. 그 부족한 시에 행운이 깃들어 적지 않은 상금의 상을 받을 수 있었으 니 그게 조상의 은덕이 아니고 뭔가. 만약에 내가 젊은 시절 한글 이름대로 제비가 되어 화류계 로 나갔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보람이었으리. 내 이름 한자에 적혀 있는 운명의 지침, 천학비 재에 그나마 작은 성실 그 덕목이라도 있었으니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틀림 없다, 영양사람 김선굉 형 말투로 얘기하거니와 나는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