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먹거리의 쌍벽,엿과 뻥튀기

박목월 시인과 함께 찰칵!

누구든 무장해제시키는 하회탈 미소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세기 사상사의 이단아 백운 심대윤의 『심대윤전집』

당나귀 달력으로 삼십 년 외 모델하우스 외

플리즈 콜 미 이모의 조카

비눗방울열매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시의 부요,혹은 그러한 기후의 발견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스필버그보다는 로알드 달

당신이 말할 차례를 기다릴 때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흙빛의 시

모범 시인 두보의 모범적이지 않은 한시

번역으로 맺은 우정

해석적 역할과 정동성(情動性)을 끌어안는 모험 사이에서

한 잔의 붉은 거울 등

2016 한국·스페인어권 문학교류의 밤 개최 외

창작 후기

흙빛의 시

글 이병일 ㅣ 시인. 1981년생
시집 『옆구리의 발견』『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등

시집『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비를 오래오래 생각한다. 불현듯 내 머릿속에는 비가 아니라 나무한 그루가 떠오른다. 나무 한 그루를 받치고 있는 흙빛이 떠오른다.
비는 흙빛을 빌려와서 제 시간과 몸을 비추고 냄새를 풍긴다. 나는 또 어떤 사물과 생명을 빌려와서 비의 몸과 영혼을 노래할 것인가.
첫 시집 상자 이후, 나는 더 치열하게 시를 썼다. 『옆구리의 발견』은 실패한 시집이다. 하지만 그 실패는 두 번째 시집으로 가는 작은 징검돌이 되었다. 두 번째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은 동식물 상상력을 통해, 자연과 문명에게 질문하고, 대화하고자 했다. 그 대화법은 사물과 생명의 특성을 잡고 거기에 상상의 힘과 시의 언어를 입히고자 했다.
구렁이와 연어와 호랑이와 마랄 사슴의 눈빛으로 본 세상은 과연 아름다울까, 식물과 나무들은 어떤 생각으로 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런 쓸모없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시의 조약돌이 되었다. 나는 시를 작고 사소한 일상에서 줍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쓸데없이 벌집을 쑤시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호되게 앓았지만 상처를 보면서 벌의 이름을 외웠다. 능구렁이와 까치독사와 살모사도 겁도 없이 잡고 놀았다. 좀처럼 무섭지 않았다. 웬일인지 어깨가 으쓱으쓱해지고 뱀을 잡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한번은 뱀을 잡기 위해 논두렁에서 길로 뛰었는데, 그만 풀밭으로 빠지게 되었다. 발바닥이 조금 아팠다.

시의 파문은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자리에서 시는 살얼음처럼 일어난다.
가장자리로 쏘다니는 것들은 약한 것들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제 삶의 한때를 반추하는 것들이다. 오늘도 산란기의 물고기들은 깊은 곳보다 가장 낮고 얇은 가장자리에 와서 알을 낳는다. 거기가 시의 성소임을 안다. 나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오래오래 서있고자 한다.
이 두 번째 시집 역시 그 가장자리에서 만난 아흔아홉개의 빛이다.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아뿔싸! 발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발바닥에 코카콜라 병조각이 박혀 있었다. 집에 왔지만 위로의 말 대신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지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집 근처의 쑥을 으깨어 상처에 붙여주었다. 거짓말 같이 피가 멈췄다. 그날은 외할머니 생신날이었는데, 나는 외가에 가지 못했고 그냥 집에서 물외나 깎아먹고 능구렁이 허물 벗는 것이나 바라봤다.
방학동안 곤충채집을 했다. 잠자리채가 없어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매미와 왕잠자리를 잘 잡았다.
망이 없는 잠자리채를 만들어서 거기에 거미줄을 친친 감았다. 왕거미집만 탈탈 털었다. 거미에게 죄를
지었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그 거미줄 잠자리채로 못잡는 것이 없었다. 때로는 거미까지 올려놓고 집을 짓는 것을 구경했다. 그렇게 나는 가장 쓸모없는 것들이 가장 이로울 수 있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내게 시가 그랬다. 지금도 시는 가장 누추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시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삶의 가장자리에서 시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가장자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장자리는 가장 하찮은 자리로 기억되지만 가장자리는 사물과 생명의 몸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시의 파문은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자리에서 시는 살얼음처럼 일어난다. 가장자리로 쏘다니는 것들은 약한 것들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제 삶 의 한때를 반추하는 것들이다. 오늘도 산란기의 물고기들은 깊은 곳보다 가장 낮고 얇은 가장자리에 와서 알을 낳는다. 거기가 시의 성소임을 안다. 나는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오래오래 서있고 자 한다. 이 두 번째 시집 역시 그 가장자리에서 만난 아흔아홉개의 빛이다. 가장 하찮고 쓸모없는 것들과 주고받은 대화다. 또한 내 시의 두엔데는 자연물이다. 나를 피해가는 것이 아닌 나와 싸웠던 것들이 흙빛으로 살아있는 시가 되었다.

※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은 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16년 창비에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