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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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글 성기웅 ㅣ 극작가, 연출가. 2016 대산-UC버클리 한국작가 레지던스 참가작가. 1974년생
희곡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 「깃븐우리절믄날」 「다정도 병인 양하여」 「가모메」 등
프리웨이 101번은 알고 보면 미 대륙 서남단의 샌디에고로부터 저 북쪽 워싱턴 주의 시애틀까지 이어지는 유서 깊은 길이다. 27년 전 우리 가족이 LA 여행을 마치고 북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던 길에 탔던 길도 이 길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쩐 일인지 나는 ‘워노-원’이라 불리던 이 길 이름의 소리를 오래도록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 2016년 6월 1일,
버클리로부터 프리웨이 5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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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는 무릇 새벽 같이 일어나 길을 떠나야 하는 법이거늘…… 늦은 아침 일어나 TV를 켜니 UCLA(로스앤젤리스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어, 나 바로 저기로 떠나려는참인데…….
UCLA에서 만나게 되어있는 K씨에게 메신저로 연락을 해보았다. 지금 캠퍼스 안에 갇혀있고 대혼란 상태라는 답이 왔다. 총격 사건은 곧 수습이 됐다지만 점심이 지나도록 나는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집을 오래 비우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결국 자동차 점검은 포기하고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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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웨이(freeway) 580번을 타고 동쪽으로 달리다 드디어 5번으로 옮겨 탈 즈음 한국말 음성안내가 흘러나오는 핸드폰 구글 맵과 영어로 외치는 내비게이터의 의견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핸드폰의 전파가 자주자주 끊어졌고, 난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통에 잘못 든 길은 아름다웠다. 지금도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캘리포니아 특유
의 낙타색 구릉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드디어 프리웨이 5번에 접어들었다. 직진을 이어갈 뿐인 지리한 질주가 이어졌다.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날 저물기 전에 도착하기란 도저히 글렀다.
# 1988년 12월 말, 프리웨이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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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말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버클리로부터 LA를 향해 자동차를 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게 원오원, 즉 101번 도로라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도를 들여다보면 그건 아무래도 프리웨이 5번이 아 닐까 싶다. 무엇보다 그게 101번 도로였다면 우린 더러 태평양 바다를 목격했어야 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의 여름부터 1년 동안 아버지는 미국 버클리대학에 교환교수로 머물고 있 었다. 미국행도, 그렇게 오랜 해외 체류도 아마 아버지에겐 첫 경험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덕에 서울에 남 아있던 우리 가족, 그러니까 어머니와 누나와 나도 두 주 동안 미국 여행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해외 여 행이란 게 흔히 경험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었던 그런 시절, 그때 난 중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중고차를 타고 LA 여행을 떠난 건 우리가 미국에 도착하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 날 아침, 시차 적응 탓이었는지 누나와 나는 늦게 일어났고 날씨는 궂었다. 머뭇거리다 늦게서야 길을 떠 났는데, 곧 억수 같은 비가 내렸고 아버지는 프리웨이 진입로를 찾지 못해 외딴 길에서 헤매야 했다. 그러 다 다행히 프리웨이에 들어섰고, 비도 그쳤다. 우리는 풍력 발전을 하는 풍차들, 정말로 비행기로 농약을 뿌릴 것 같은 거대한 밭들, 황무지처럼 보이는 사막 지형 등을 지나쳤다. 평탄하고 넓은 길은 끝없이 이어 졌다. 마지막엔 산악 지형이 눈앞에 나타났다. 눈발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사위가 컴컴해졌다. 길 위의 전광판들이 위험하다는 알림을 내보냈다. 우리는 아무 월동장비도 갖추지 않은 아버지의 낡은 차가 미끄 러져 사고를 내지는 않을까 가슴을 몹시 졸여야 했다.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그날의 여정은 이상과 같다. 나 역시 눈발이 몰아치던 그 어둡고 사납던 길만 큼은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가 싶은 공포감에 휩싸였었으니까.
하지만 그 경험을 버클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고개들을 갸웃거린다. 캘리포니아에 그런 눈 보라가 칠 리 없다는 거다. 그 수수께끼는 얼마 전 우연히 풀렸다. 그해 겨울에 캘리포니아에는 아주 예외 적인 강추위가 몰아 닥쳤었단다.
# 2016년 6월 7일, LA로부터 프리웨이 101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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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했던 대로라면 나는 이틀 전에 LA를 떠나 버클리로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북쪽 대신 남쪽으로 차를 몰아 휴양 도시 샌디에고에 다녀왔다. 한두 가지 일을 미루거나 제쳐버리고 나니 애써 귀가를 서둘 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캘리포니아 주 예비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출발을 미루고 숙소에서 가까운 곳 에 있는 투표소에 들러 구경을 좀 했고, 버니 샌더스의 선거운동 센터로 쓰이는 카페에 들러보기도 했다. 은행에 들러 현금을 좀 찾고 할리우드 거리에서 요기를 한 후에야 여름 햇볕이 난폭하게 쏟아지는 LA에 안녕을 고했다.
산타모니카 해변 쪽으로 가서 1번 도로로만 북진을 해서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그쪽 길로 가려면 교통 체증을 감수해야 하나보다. 구글 맵이 가까운 101번 도로로 인도한다.
프리웨이 101번은 알고 보면 미 대륙 서남단의 샌디에고로부터 저 북쪽 워싱턴 주의 시애틀까지 이어지 는 유서 깊은 길이다. 27년 전 우리 가족이 LA 여행을 마치고 북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던 길에 탔던 길도 이 길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쩐 일인지 나는 ‘워노-원’이라 불리던 이 길 이름의 소리를 오래도록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 2016년 5월의 워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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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인 5월, 서울에서 어머니가 버클리로 여행을 왔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어 머니와 나는 27년 전 기억들의 조각 맞추기에 들어갔다.
둘이 함께 한국인 여행사의 미국 서부 관광 버스투어를 다녀오기도 했다.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니언 을 찍고 LA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북상하는 게 그 투어의 코스였다. 그 마지막 코스로 달렸던 길 도 이 101번 도로였다.
오랜만에 단둘이 여행을 하며 어머니와 나 사이는 삐걱대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 대륙의 프리웨이를 하 염없이 달리며 이런저런 관광지를 수박 겉핥듯 방문하는 그 버스투어의 코스나 여행가이드의 무심하고 무례한 태도도 마뜩찮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가족의 여행은 즐거움보다는 짜증과 다툼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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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2월의 워노-원 … 어머니의 비상한 기억력에 따르면, 27년 전 그때 우리 가족이 LA에 머물렀던 건 불과 1박 2일에 지 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LA에 도착했던 그 밤, 우리는 오렌지카운티에 살고 있던 당숙 댁을 찾아 가 묵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디즈니랜드로 놀러 갔다. 늦은 오후에는 사돈뻘 되는 먼 친척의 안내 를 받아 UCLA 캠퍼스를 구경했다. 그 직후 우린 LA를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얼마 후 해가 졌고, 우리는 도중에 어 느 소도시에 있는 인(Inn)을 잡아 하룻밤을 잤다. 그 숙소는 웬일인지 나도 기억이 많이 난다. 난 그 도시 이름이 킹시티라고 기억하는데, 날이 밝고 보 니 일대에 인적 없이 쓸쓸한 공장들이 늘어서 있 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마저 길을 떠나 샌프란시스 코 남쪽 어딘가 아버지 고등학교 동창생의 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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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와 나는 다른 집 아이들과 모노폴리라는 보드게임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블루마블과 거의 비슷했 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그 한국인 2세들은 모두 유쾌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 게임에서 나는 오래 가지 못 하고 일찍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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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 7일,
캘리포니아 1번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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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 도로보다도 더 바싹 태평양 바닷가 에 붙어 구불구불 이어지는 것이 1번 도로, 혹은 캘리포니아 주도(州道) 1번이다.
며칠 전 UCLA에서 만난 W교수도 이 길 을 달려볼 것을 권했었다. W교수는 한국 문 학을 전공하는 일본인 교수인데, 페이스북을 통해 이 분이 학회 참석 차 UCLA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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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교수는 최인호의 소설 『깊고 푸른 밤』에 이 1번 도로가 나온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이 소설은 동명 의 영화 <깊고 푸른 밤>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1980년 즈음 한국 작가와 가수가 샌프란시스 코 근처 산호세로부터 LA를 향해 1번 도로를 낡은 자동차로 달리는 내용이란다.
가비오타 주립공원 즈음에서 나는 101번을 버리고 1번 도로로 갈아탔다. 하지만 그토록 절경이라는 빅서 구간에 다다르기 전에 해가 지리라는 건 뻔했다. 여행 가이드북에 야밤 에 1번 도로를 달리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적혀있었던 게 생각났다. 모로바위 비치란 곳에서 차를 세 우고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핸드폰을 켜고 싼 숙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인(Inn)의 카운터에서 인도계 매니저가 나를 맞았다. 방에 들어가 TV를 켜니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결과 가 나오고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산타 모니카에서 열린 집회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고, 버니 샌더스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을 이어가겠다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우니 70여 마일의 속도로 달리던 관성이 아직 몸에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좀 싱거웠던 지난 일주일 동안의 여행을 되새겨봤다. 어쩌면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지난 세월을 더듬어봤 을지도 모른다. 그해 겨울 옹기종기 모노폴리 게임을 하던 그 한국계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 고 있을까……, 뭐 그런 생각도 해보고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