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네 번째｜드라이
글 장성호 ㅣ 시인. 1994년생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수상
드라이. 그러니까 마른다는 것은, 언젠가 한 번이라도 젖었던 적이 있다는 뜻이므로 그것은 기억으로서의 남음이기도 하면서, 다 울고 난 후에도 계속 슬플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불가해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대한 예감으로서의 남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드라이는 기억하는 동시에 예감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dry[draɪ] : ①마른, 건조한 ②(날이)가문, 비가 오지 않는
어떤 단어는 어떤 기분이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내 기분을 대신 말한다고 믿는다. 단어가 가끔 말해지고 싶지 않은 나를 말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1) 어떤 기분이 지속되면 그 기분은 생활이 되고 생활이 지속되면 그 생활은 하나의 계절 혹은 그 이상의 것이 된다. 어떤 단어는 그래서 어떤 계절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단어 속에 들어가 그 단어의 이름으로 계절 하나
를 만들고 살아보는 것. 그런 일이 쓰기라는 작업이 아닐까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정의를 내려 본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여름부터 이번 여름까지 내 시의계절의 이름은 ‘빛’이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눈이 빛이 들어오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는 신체적 탓도 있지만 그즈음부터 시를 쓸 때면 늘 너무 밝은 빛 속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 혼동(混同)에 대해서 자주 썼다. 그 안에서 나는자주 착각하고 그래서 자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사
람이었다. 물론 사람은 변하지 않는지라 나는 지금도 그렇다. 어찌되었든 그런 것들을 쓰다 보니 점점 무서웠다. 어떤 것을 끝장까지 보지 못하는 내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생각이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돌파구를찾고 싶기도 했고 뭔가에 기대고 싶기도 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사라지는 혼동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고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남다’의 사전적 풀이는 ‘다 쓰지 않거나 정해진 수준에 이르지 않아 나머지가 있게 되다’이다.
언뜻 보면 이전에 하던 생각에서 있다의 개념에 좀 더 치우친 단어 같다. 하지만 남겨진 것들을볼 때 역설적으로 없어진 것들이 더 잘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없는 것도 남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내 삶에는 없음으로써 남았던 것들도 꽤 있었던 것 같다는 예감 아닌 예감이 들기도 했고 어떤 없는 것이 남는다면 그것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남아있다’라는 말은 있는데 ‘남아없다’라는 말은 왜 없을까 같은 실없는 말놀이를 하다가 혼자 웃기도 했다. 이런 잡스러운 단상을 이어가던 중, 최근에 다른 단어 하나가 나에게 왔다.
드라이(옷을 드라이하다 할 때의 그 드라이는 당연히 아니다), 앞서 밝혔던 것처럼 그것은 분명 당시 나의 기분이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이 아니어도 이번 여름 나는 계속 내 안의 무언가가 말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느끼는 와중에도 나는 분명 예전과 다름없이 존재했다. 나는 말라가는 그것으로부터 남겨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른’이라는 뜻을 가진 드라이라는 말이 한동안 막혀서 말라가고 있던 생각들을 다시 흐르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드라이. 그러니까 마른다는 것은, 언젠가 한 번이라도 젖었던 적이 있다는 뜻이므로 그것은 기억으로서의 남음이기도 하면서, 다 울고 난 후에도 계속 슬플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불가해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대한 예감으로서의 남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드라이는 기억하는 동시에 예감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 드라이가 붙는 단어들을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드라이플라워는 죽은 뒤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만으로 남아있는 기이한 현존 같은 것이고 드라이아이스는 태어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차츰 사라지는, 그러면 서 연기라는 미지의 몸이 된다는 점에서 예감의 육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소 억지처럼 느껴질 수 있는 생각들임을 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이 새로운 단어를 일단 계속 밀고 나가볼 계획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말복이 지났다. 머지않아 다음 계절이 올 것이다. 나도 나만의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계절을, 그 계절이 곧 왔으면 좋겠다.
1) 강정 시인의 시 「안녕」(『키스』, 문학과지성사)에 나오는 문장 ‘내가 단어를 말할 때 / 단어는 말해지고 싶지 않은 나를 말한다’에서 가져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