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글 백지은 ㅣ 평론가. 1973년생
평론집 『독자시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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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코미디와 비극은 상반된 각각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에 실리는 감정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의 공감이최대화될 때 세상은 온통 준엄한 색채를 띠지만 모든 것에서 물러나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이 되면 많은 드라마가 희극으로 바뀐다.
웃음보다 천연한 웃픔
● 웃음에 있어 감정보다 더 큰 적은 없다고, 『웃음』의 저자 베르그송은 말했다. 애정이나 연민, 예민한 감수성이나 감정적인 반향을 잠시나마 잊어두지 못한다면 웃음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감정을 가진 인간에게 웃음은 그리자연스러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심정의 순간적인 무감각 상태”를 필요로 하는 그것은 감정을 제거하고 “순수한 지성에 호소”하여서만 나타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실로 코미디와 비극은 상반된 각각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에 실리는 감정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의 공감이 최대화될 때 세상은 온통 준엄한 색채를 띠지만 모든 것에서 물러나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이 되면 많은 드라마가 희극으로 바뀐다.1)
1) 앙리 베르그송, 『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 정연복 역, 세계사, 1992, pp.13~16 참조
그렇다면 ‘웃프다’는 원리상 어떤 자연스러운 상황 혹은 기분을 가리키기에 필수적인 단어일까?
‘웃기다’와 ‘슬프다’를 한꺼번에 표현하는 이 말은 언제부턴가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이는 중인데, 웃김을 감지하는 지성과 슬픔에 공명하는 감성이 동시 발흥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빈번하고,사전에도 없는 이 단어는 그때마다 상당히 유용한 것이다. 웃김은 감정을 제거해야 하고 슬픔은 지성이 멈춰야 하는 상태라면, 순수한 웃김이나 순수한 슬픔은 단지 추상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 경험이 있는 우리에겐 대체로 그냥 웃음보다 웃음+α의 상태인 ‘웃픔’이 더 맞고 더 잦다. 이 시대, 우리의 웃음에는 무엇이 플러스되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세 편의 소설을 읽어본다.
웃음+자조: 가장 보통의 초상
● 임성순의 『자기 개발의 정석』(민음사, 2016)은 웃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웃기만 할 수 없는 상황이 겹친 이야기다. 대기업에 이십여 년을 헌신한 “생존자”인 마흔 여섯의 이 부장, 아내와 아이는 “이 나라엔 답이 없”다며 캐나다로 가버렸고, 답 없는 곳에 혼자 남은 그는 외롭고 우울하지만 “의무에 치여 사는 삶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 여기며 지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전립선염 치료로 받은 마사지에서 “생전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한 그에게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65)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쾌락이 해일처럼 그의 내부를 완전히 휩쓸었음에도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 불가에서 말하는 돈오라는 순간이 어쩌면 이 순간인지도 몰랐다.
이 부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분명한 무언가를 보았고, 느꼈고,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159)
평생을 이 사회의 시스템에 철저히 발맞추어 온 남자가 우연히 만난 쾌락을 통해 “순수한 행복”(154)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수정하기까지의 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전반적으로 희극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성기와 성욕, 배설과 쾌락, 적나라함과 수치심이 중심되어 굴러가는 이야기이므로 거의 모든 국면이 정황상 ‘어쩔 수 없음’의 정조를 기본으로 깔고 있는 게 큰 이유일 것이다.
재밌게 읽힐 목적이 직접 노출된 쪽이지만, 상황의 비루함이 희극성의 전부는 아니다. 자기 계발서의 고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브 코비)에 제시된 7개 항목(‘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등등)을 그대로 소제목으로 차용함으로써, 개발과 계발, 본능과 학습, 우연과 의지, 육체의 쾌락과 정신의 깨달음등을 짝지어 반대항들의 겹침에서 나오는 아이러니적 희극성도 적극 노린 셈이다.
조롱과 연민을 동시에 유발하는 이 부장의 우여곡절에는 “자위라는 성적 모티프를 자본주의가 가장 무서워하는 자족의 메커니즘으로 굴절”2)시켰다는 또 다른 의미도 덧붙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스스로를 수단화하고 소외시키는 인간
2) 박혜진, 「부장님의 꿈」, 《세계의문학》 201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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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경남 의령에서 실제로 일어난
‘우순경 총기 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짐작도 이해도 불가능한 ‘악’의
실체를 응시하기보다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그 순간 막을 내린 인생들,
그 하나씩의 ‘우주들’을 살뜰하게 보듬는다.
의, 진정 자기를 위한 “가장 자족적인 행복 추구”(67-8)라는 이 순정하고 엄연한 쾌락의 수긍에단지 가벼운 웃음의 목적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에 눈이 멀어 인간이 지닌 가능성을, 그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그런 둔한 인간으로서만 “생존자”가 되는 세상에 대한, 서글픈 자조를 못 느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밑바닥에는 오늘도 이 비루한 세계를 스스로의 비루함으로 지탱해야 하는 이들의 정제된 우울함도 넘실거린다. 웃기지만 안됐고, 둔하지만 우울한 보통사람의 인생역경은 이 시대 가장 전형적인 웃픈 이야기일 것이다.
웃음+악 : 공포와 분노에 맞서
● 김경욱의 최신작 『개와 늑대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16)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비극이라도 한없이 웃으면서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야기다. 1980년대 초반 어느 봄날의 저녁 이후, 경상도 한 시골 마을의 순경 황씨가 카빈 소총 두대를 메고 수류탄을 품고 돌아다니며 전화 교환원을 시작으로 자기 아내까지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 사살한다. “아덜이 폭죽 터뜨리는 것맹키로 따닥, 카는 소리”(85)와 함께 거꾸러진 56명의 사람들은 “순경이 총으로 사람 잡는다!”는 불가해한 사실 앞에 놀란 눈을 감지도 못한 채생을 마감했으리라. 1982년 경남 의령에서 실제로 일어난 ‘우순경 총기 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짐작도 이해도 불가능한 ‘악’의 실체를 응시하기보다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그 순간 막을 내린 인생들, 그 하나씩의 ‘우주들’을 살뜰하게 보듬는다.
벌어진 일들의 비극성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처참한 이 사건의 진상을 알자면, 미치광이의 사악함과 평범한 무고함이 오직 우연으로 마주친 불행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겠으나, 마침내 우리의애달픈 마음이 닿을 곳은 사악한 살인범이 아니라 불쌍한 피해자들일 것이다. 김경욱은 칼로 한순간 무처럼 잘려버린 삶들의,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도 천연덕스럽게 왕성했던 그 생의 에너지들을 복구해낸다. 누구를 만나왔고 어떻게 생각했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조금 더 길거나 유난히 짧은 인생들을 채웠던 무수한 순간들은, 마침내 허망한 미완으로 남았다 해도 결코 모자라거나 힘없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비극 이후의 공포보다 생생한 비극 이전의 활기는, 짤막한 문장들의 경쾌한 음보에 실려 빠르게 질주한다. 끔찍한 사건에 붙들린 생들의 처연함은 상쇄되고 처연한 죽음의 끔찍성은 배가된다.
말의 리듬이 어떻다고 비극성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끝내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는 없다. 잔혹한 범죄의 현장이 순간 황당한 소극처럼 보였다고 해서 비극이 희극으로 위장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내용에 반하는 듯한 유머 러스한 화법은 웃음으로 슬픔을 덜자는 수작이 아니며,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찾을 수 있다는 역설도 아닌 것이다. 다만 인간적 이해가 너무나 무기력한 고통에 대해서도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막대한 슬픔을 견딜 만한 미약한 웃음을 간신히 불러내는 것일 터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어떤 실소와 조소를 머금었다 해도 그건 울음을 억누르는 웃음일 뿐이지만, 공포와 슬픔에 마냥 매몰되어서는 어둠을 헤치고 고통을 이겨낼 지성에 힘을 대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개와 늑대의 시간』의 ‘웃픔’은, 무력감을 이긴 분노, 허망함을 물리친 지성이 선택한 최적의 전략이다.
웃음+고통 : 서럽고 아름다운
● 윤성희의 단편 「베개를 베다」(『베개를 베다』,문학동네, 2016)는 가슴이 먹먹하도록 슬픈 사연속에서도 기어이 눈물 섞인 웃음을 머금지 않을수 없게 하는 이야기다. 이혼한 전처의 빈 집을보살펴주는 남자가 있다. 현직 엑스트라 배우. 일흔 살이 된 자기를 상상할 수 없어서 엑스트라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빈 집에서 그는 부재하는 (前)가족들을, “가족이 셋이었을 때”(108쪽)를 하염없이 떠올리는 중이다. 요즘은 시체로 누워있는 연기를 하러 규칙적으로 촬영장에 다니고,포장마차에서 만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가끔 술을 마시며 지낸다. 별 볼 일 없는 삶이라고?
윤성희의 소설이 대개 그렇듯, 이 이야기도 말해진 내용보다 훨씬 크게 어른거리는 말해지지 못한 내용을 짐작해야 어떤 삶의 윤곽이 겨우 드러날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눈치 채야 할 것은, 그가 상기하는 ‘가족의 부재’에, 다시 부재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없는 가족은 아내만이 아닌데도 그는 지금 필리핀에 간 아내의 부재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단골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초등학생 아들, 방학 동안 키가 15센티미터나 자라던 삼년 전의 아들, 성년이 되는 날 자기에게 근사한 선물을 하겠다던 그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복권 3등을 세 번 당첨시켜준 행운의 꿈을 그는 왜 아들에게 팔지 못하고 “이제 대신 아내에게 팔겠다고”(128)했는가? 어쩌면 아들의 부재에 대해 말하기를 필사적으로 삼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들의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갔던 단골집에 아내와 “둘이 와서 삼인분을 시”키고서 “쌈을 씹는 아내를 보며 미어지다라는 단어”를 생각하던 그는 볼이 미어지는 데서 그치지 못하고 끝내 가슴이 미어진다.
그는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110)
그가 돌아가고 싶은 ‘옛날’에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미래를 미리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짱구는 못 말려>에서 과거에 갇힌 엄마 아빠를 발냄새로 깨우는 것을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가 “웃다보니 슬퍼”져서 “아주 잠깐 울”고 마는 오늘의 그에게 일상은 웃기고 일생은 슬프다. 아마 엉엉 울 수도 없이 황망하게 아들을 잃었을 것이나, “큰일났습니다”라는 비장한 대사는 영화 속에서였지 아내와 눈을 맞춘 현실에서가 아니었고, 그것이 그는 부끄러웠나 보다.
하지만 슬픔을 비장하게 소화하지 못한 것은 그의 비겁함 때문이 아니다. “현재를 잃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128) 그를 잡아줄 수 있는 건 ‘발냄새’ 같은 터무니없는 어떤 것이어야했고, 그렇게 울다 웃다 할 때 간신히 그는 삶을 이어 갈 용기를 지닐 수 있었겠다. 이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를 듣고도 우리는 슬픔을 뚫고 잔잔히 퍼지는 웃음의 기운을 끝내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어떤 불행도 잠식하지 못하는 인생의 서럽고 아름다운 에너지는 이렇게 길어 올려 진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 밀란 쿤데라는 유럽의 웃음의 역사가 그 끝에 이르렀다고 했다. 쾌활한 것과 우스운 것이 같은 것이었던 라블레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통해서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여다보아 왔기 때문”에 웃음에서 라블레적인 쾌활함은 사라지고 이제는 절망적 희극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19세기의 고골은 “재밌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찬찬히 들여다보면 점점 더 슬퍼진다”고 했고, 20세기의 이오네스코는 “우스운 것과 무서운 것을 갈라놓는 것은 거의 없다”고 했다.3) 21세기의 우리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고 말해야할까. 우스운 것도 서러운 것도 끝내 ‘웃픈 것’이 되고 마는 삶의 아이러니는 이 시대에 별로 이상한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니며, 소설이 다루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인 한 ‘웃픔’이라는 아이러니는 근원적으로 소설의 재료이자 전략이자 효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비교적 손쉽게 확인되는 소설세 편을 읽어 보았다. 앞에서 살핀 대로 『자기 개발의 정석』과 『개와 늑대의 시간』과 「베개를 베다」는 각각 차례로 웃픔을 소설의 재료로, 전략으로, 또 효과로 이용하고 이끌어낸 이야기들이다.
이 시대의 인생과 사회에 정직한 감정과 성실한 지성으로 대응한 이야기라면, 웃음도 슬픔도 아닌 웃픔이야말로 소설이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실존적 가능성임을 간파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웃픔은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이고, 언제나 삶의 복잡성에 가장 민감하고 가장 적극적인 소설은 당분간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바로 그 얼굴을 시원스레 벗어던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3)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권오룡 역, 책세상, 1990, 15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