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글 정철훈 ㅣ 시인, 소설가, 문학저널리스트. 1959년생
시집 『빛나는 단도』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산문집 『내가 만난 손창섭』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등
1937년 초여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대장정의 종착지인 중국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서 중국공산당대회가 소집되었다. 일단의 외국인 취재진도 국민당 군대의 삼엄한 경계선을 뚫고 그곳에 도착했다. 빼어난 미모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갓 서른 살의 미국인 전기 작가 님 웨일스(본 명 헬렌 포스터 스노, 1907~1997)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대회 개최가 며칠 늦춰진다는 소식에 그녀는 영어로 대화할 사람을 찾기 위해 옌안의 노신도서 관으로 향한다. 영문 서적을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유난히 한 사람의 이 름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그 여름에만 수십 권에 이르는 영문 서적을 빌려갔던 것이다. 대출 카드 에 ‘장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님은 자신보다 앞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 특파원 자격 으로 옌안에 머물고 있던 아그네스 스메들리(1892~1950)에게 “장명이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조 선인이라네. 지금 옌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지.”
님은 심부름꾼을 통해 언제 한번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장 명에게 전달한다. 일주일 후 님의 동굴 가옥으로 낯선 사람이 찾아온다. 님과 10여 개의 가명을 쓰 며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은 이렇게 만났다.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이었 다.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걸게 만드는 장맛비. 그러니까 1937년 여름, 옌안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놓은 장맛비는 옌안에 단 열흘만 머물 계획이었던 님을 두 달 가량 고립시켰다.
온종일 먹구름이 낮게 깔린 중화소비에트의 해방구 옌안의 장맛비는 강을 범람시켰을 뿐만 아 니라 외지에서 온 님의 가슴에도 파문을 만들어 놓았다. 두 사람은 두 달 남짓한 기간에 무려 스물두 번의 만남을 가졌다. 장맛비는 교량을 무너뜨리고 산사태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님과 김산의 경우처 럼 한 생애를 통틀어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하기도 했다. 님은 1990년에 쓴 『아리랑 회고』에서 “내가 옌 안에 고립되지 않았던들 나는 김산과의 면담과 기타 언론인에게 필요한 특종기사를 쓸 기회를 갖지 못했 을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장맛비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39년 필리핀 바기오 섬에 있는 컨트리 클럽에 묵었던 님으로 하여금 김산의 이야기를 집필케 한 결정적인 계기가 또한 장맛비였다.
거기서 40일 동안이나 퍼붓는 호우 속에서 『아리랑』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김산이 한 모든 이야기들을 생생 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도 『아리랑』이 훌륭한 문학적 성격을 지닌 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호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때 그 책에다 최고의 문학성을 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 백선기, 『미완의 해방노래』,
정우사, 1993 여기서 짚이는 게 있다. 님이 김산과의 첫 대담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고 서술하고 있는 『송 오브 아리랑 (Song of Ariran)』의 도입 부분이 그것이다. 신상문제에 대한 질문을 꺼려하는 김산의 경계심을 허물기 위 해 님은 먼저 말을 걸면서 1936년 여름의 대부분을 조선과 만주에서 보냈다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금강산도 구경하고 싶었고 조선을 알고 싶기도 해서 조선에 갔던 거지요. 그다지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등산을 마음껏 했어요. 금강산에 올라갔다가 최고봉 정상에서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지독한 태풍을 만나기도 했어요. 거의 모든 다리와 길과 쇠줄이 파괴되어 있더군요. 곳곳에서 급류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하지만 조선인 안내자가 우리를 무사히 산 아래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 님 웨일스·김산, 『아리랑(Song of Ariran )』, 송영인 옮김. 동녘, 1992
1936년 여름의 조선은 우기였을 뿐 아니라 태풍까지 몰아친 최악의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 님은 남편 인 에드거 스노와 함께 금강산 정상 비로봉에 올랐던 일을 김산에게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다. 몸으로 조 선의 홍수를 겪었다는 님의 말이 김산을 움직였던 것일까. 김산은 “맞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큰 물난리가 났었지요”라고 맞장구를 쳤고 님은 “그 후 서울의 어느 다리 위에서 그 광경을 다시 목격할 수 있었지요. 소, 돼지, 집이 흙탕물 속으로 마구 떠내려가고 있더군요”라고 응수한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야기한 태풍은 1936년과 1923년에 발생 한 태풍 3693호와 2353호로 각각 사망자가 1천 232명, 1천 157명이었다. 위성관측이 되지 않았고 태풍의 이름도 없어 숫자만 붙였던 것이다. 당시엔 일기예보도 없었고 한가위 기간이어서 차례를 지내다 휩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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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하나의 가설이 성립된다. 1936년 8월 초하루,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한 옛 서울역 대합실 의 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그날 오전 육중한 현관문을 밀고 대합실에 들어가 개찰구 쪽을 지켜보며 여동생 옥희와 옥희의 애인 K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우기여서 빗물 뚝 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든 이상은 습도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대합실 유리창을 넌지시 손으로 문질러보 았을 것이다. 이상의 산문 「동생 옥희 보아라」에 따르면 옥희는 K와 함께 초하룻날 아침에 이상을 찾아와 만주엔 K만 떠나기로 했으니 함께 배웅이라도 하자며 “오빠, 이따가 정거장에 나오세요”라고 눙치듯 말했 고 이에 이상은 “암! 나가고 말구, 이따 게서 만나자꾸나”라고 대꾸한다.
옥희를 기다리며 출입구에서 개찰구까지를 눈으로 쉼 없이 더듬던 이상은 만주행 국제열차가 기적을 내 뿜으며 무쇠바퀴를 굴리기 시작할 때 아뿔사, 입맛을 쩝쩝 다시며 집에 돌아와서도 반신반의다. “K의 양복 세탁이 어쩌니어쩌니 하던” 것은 그보다 며칠 전 자신을 찾아온 옥희의 말이다. “그래저래 차 시간을 못 대 인 게지”라고 푸념하던 이상은 이튿날 오후 심란한 마음을 뒤로 하고 여름방학을 맞아 동경에서 온 친구 들과 종로통에서 어울려 석양 무렵부터 술잔을 기울인다.
어쩌면 금강산 산행을 마친 님은 에드거 스노와 함께 조선총독부가 버티고 선 광화문통을 거쳐 이상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종로통을 거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님은 이상과 종로 어느 뒷골목에 서 옷깃이나마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 가설(假說)은 유랑극단의 가설무대(假設舞臺)만큼 신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은 신파에 있다. 그때는 1936년 8월 1일부터 16일까지 독일의 수도 베를 린에서 제11회 하계 올림픽이 열리던 시기이기도 하다. 스노 부부가 올림픽 소식을 듣기 위해 숙소에서 나 와 라디오 중계방송을 틀어놓은 종로의 다방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렇듯 장맛비 는 이상과 님 웨일스와 김산을 역사의 우연에서 필연으로 묶는 매듭일 수 있다.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들 어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장맛비 말이다. 이건 단순히 20세기 초 경성과 옌안을 순차적으로 방문한 서 양인 님 웨일스의 눈에 비친 목가적인 풍경은 아니다. 다가올 조선의 운명에 대한 예감으로 가득 찬 빗줄 기의 노래이자 피로 쓴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