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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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글 이이체 ㅣ 시인. 1988년생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인간이 버린 사랑』, 산문집 『당신을 헤매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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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ㅣ 시인. 1917~1945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 2017년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백주년이다. 올해 초에는 시인의 삶을 다룬 영화 <동주>가 개봉됐다. 한동안 옛 시집 초판본의 출간 붐이 있었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이러한 초판본 시집의 출간 붐은, 단순히 문화적 허영을 충족시키려는 한때의 움직임에 불과하고 그것은 맥락에 따라 맞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갓공부하기 시작한 신진학자가 할 법한 너무 안이하고 도식적인 분석이다.
조금만 더 숙고해보면 이 현상의 기저에는, 독자의 수용 미학이 윤동주 등의 옛 세대로 표상되는 옛 시와 옛 감수성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시대 착오적 고형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해낼 수 있다. 달리 말해, 윤동주 시인과 같은 분들의 시대적 혼미함에 대한 고전으로서의 시간적 무게에 대한 체감은, 실제의 그것을 깊이 곡해하고 대상화해낸 결과라는 뜻이겠다. 순연한 언어도 언어지만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도 묵묵히 모어로 시 쓰기를 계속한 그 삶의 내력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 이의 시를 우러러보는 것이겠다. 생전에는 시집을 갖지 못했으나(그의 시집은 1948년에야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지금은 『정본 윤동주 전집』(문학과지성사, 2004)을 비롯해 많은 전집들이 나오고 있으며, 또한 그의 시에 대한 연구가 이미 오래도록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선생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겸연쩍으셨는지 단어를 고르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더디지 않고 차분했으며, 고른 말들은 정확하고 아름다웠다.
먼저 선생님의 성장에 관해 여쭙고 싶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의 생애 전반을 여쭙는 셈이겠네요. 그 중에서도 먼저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시기 전까지의 기억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북간도 명동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중등교육은 용정으로 이사하셔서 받으셨더라고요.
윤 동 주 네, 우선 집안 이야기부터 소략하게나마 해야겠군요. 우리 집안은 본래 파평 윤가로, 조선 세조시절에 함경북도 회령으로 귀양 간 조상님을 분파의 가장 큰 어른이라고 잡습니다. 훗날 제 증조할아버지께서 1886년 가솔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신 후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집안이 명동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저는 명동에서 소학교 공부도 하고 자라다가 1931년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용정이라는 곳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연히 저희 집안 전체가 용정으로 이주했는데, 이게 상당히 큰 변화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동에서 4대에 걸쳐 자리 잡은 가족이 터전을 옮긴 거니까요.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용정으로 이주하시고서부터 문학을 시작하셨다고 보더군요. 은진중학교에서 어떻게 학습하고 성장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 시기에 문학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궁금합니다.
윤 동 주 은진중학교에서 제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아갔어요. 2학년 때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참가해 상을 탄 적도 있습니다. 재봉틀 다루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이 무렵 교과서가 전부 일본어로 되어 있어서, 조선어로 된 글이 그리웠습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윤석중(尹石重) 선생의 동시와 동요에 흠뻑 빠져서, 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문학 공부와 학교 공부를 병행하는 저의 ‘공부 생활’이 시작된 셈이지요. 그러다가 1935년 봄 학기에 친구 문익환이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저도 그 친구 따라 가을 학기에 숭실중학교로 편입해서 잠시 다녔는데, 이때 《숭실활천》에 시를 발표하면서 지면에 작품을 싣는 맛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 기쁨도 잠시, 1936년 1월 교장으로 계시던 윤산온(尹山溫, 본명: George S. McCune) 선교사님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한 때문에 파면 당하면서 항의 시위가 있었고 학교가 무기한 휴교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3월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어요. 광명학원은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을 군국주의의 첨병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 난 곳이어서 성적에도 변동이 있을 만큼 정신적 부침이 있었어요. 그래도 《카톨릭 소년》 같은 잡지에 동시들을 몇 차례 발표하는 등 문학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상(李箱)의 시도 처음 읽었어요. 신선하고 충격적이었기에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1938년 2월에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해 4월에 벗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는데…… 입학하기까지 다소 고집을 부리면서아버지 속을 썩였습니다. 이때 저는 용정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문학을 하고 싶은 마음을 이미 굳게 먹은상태였거든요. 아버지께서 저를 설득하실 수 없었지요.
용정으로의 이주를 두고 ‘큰 변화’라고 하셨는데, 이는 경제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실 무렵에 집안 사정이 굉장히 어려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윤 동 주 아버지께서도 의과에 가라시면서 문과 진학에 반대하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신께서 문학 쪽 공부를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젊으셨을 때 중국 북경이나 일본 동경 등 외국까지 나가셔서 공부하신 분입니다. 돌아오셔서 명동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셨고, 웅변과 휘호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경제적으로는 온전하게 자립하는 데 힘드셨습니다.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사하시면서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 의미로 인쇄소를 차리셨지만 실패하셨어요. 우리 집안이 원래 자리 잡은 명동은 텃밭과 타작마당이 있고, 우물이나 조그마한 과수원에다가 지붕 얹은 커다란 대문까지 있는 그런 마을이었고, 우리 집은 거기서 가장 큰 기와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용정으로 이사 온 집은 스무 평 남짓한 초가집이었어요. 그 집에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저와 동생 둘에다가 고종사촌 몽규까지 도합 여덟 식구가 살았습니다. 용정에 온 지 얼마 안 돼 막내 광주까지 태어났으니 아홉 식구가 살았지요. 이 이주가 얼마나 힘겨운 결정이었는지 알 만하지요.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오죽하면 할아버지께 경제적으로 의지하시기까지 했겠습니까. 제가 광명학원을 졸업할 무렵만 해도 아버지께서 포목상을 하시면서 겨우 버틸 만큼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았거든요. 그 뒤에도 포목점이 실패하고 양계장을 하셨는데 그마저도 실패하셨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버지께서 저의 문과 진학에 반대하신 것도 심정적으로나마 이해됩니다.
경제적으로 난처해진 배경이 연전 진학에 대한 아버지와의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을 빚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윤 동 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리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맞고 틀리고는 정확한 것이 아니에요.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경제적 곤란만이 문과에 관한 아버지의 입장을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인즉슨 경제적 곤란을 만든 배경과 그에 대한 좌절감들이 더더욱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시는 바로 그러한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것으로 삶을 내파하게 만드는 창구가 된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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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실 무렵에 대해 궁금합니다.
윤 동 주 저는 소위 공식적인 등단이라는 것을 거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1935년 만 열여덟 살에 숭실중학교에서 내던 문예지 《숭실활천》에 시 「공상」을 발표한 적 있는데, 구태여 말하자면 그게 제 시가 처음 활자화된 경우라고 할까요. 이듬해 《카톨릭 소년》 10월호, 11월호, 12월호에 각각 동시 「거짓부리」, 「병아리」, 「빗자루」를 발표했어요. 1937년에도 1월호와 3월호에 동시를 한 편씩 발표했지요. 여하간 구태여 말하자면 이런 이력들이 제 시 쓰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송몽규는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가 당선된 바 있는데, 저에게는 그것이 항상 자극제였습니다. 젊을 적에야 모종의 경쟁의식 때문에 초연한 척 노상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지”라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것은 치기였습니다. 그러나 그치기 덕분에 몽규도 저도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치기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언급하신 송몽규 선생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시지요? 고종사촌이신 동시에 한 동네에서 함께 자라고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해오셨잖아요. 나중에는 연희전문학교도 함께 진학하시고 일본 유학도 함께 가셨고요. 이를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러닝메이트 같은 존재였을 듯싶습니다.
윤 동 주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러닝메이트라기보다는 소울메이트라고 해두고 싶군요(웃음). 송몽규 형과는 인연이 깊어요. 어린 시절부터 명동촌에서 자라왔고, 익환이나 다른 친구들과 더불어 쭉 같이 살다시피 해온 친구죠. 특히나 문익환 등의 친구들은 나중에 공부한 터전이 달랐지만, 몽규와는 연희전문학교도 같이 진학해 동문수학했고 일본에 가서도 서로 다른 대학에 갔어도 계속 교유했습니다. 다른 벗들보다도 더 각별할 수밖에요.
광명학원 시절에 선생님께서 백석 시인의 시집 『사슴』을 좋아하셨고, 정지용 시인의 시를 좋아하셔서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시고서는 정지용 시인의 북아현동 자택에 방문하시기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백석 시인의 『사슴』은 구할 수 없자 학교 도서관에서 내내 손으로 직접 베껴 쓰고는 한 권을 소장하셨다지요. 거기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서 큰 감동과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후배 시인들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여러 시인들의 시를 섭렵하다시피 열심히 읽으셨던 것으로 아는데, 그 중에서도 백석 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랄지 정지용 시로부터의 영향이 유독 뚜렷하게 보입니다. 시어나 표현의 차원에 국한시켜보지 않아도 그분들의 시와 어떠한 연대의식에 가까운 태도 같은 것들을 갖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윤 동 주 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백석 시인의 『사슴』은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요. 「노루」를 비롯한 33편의 시가 실린 시집으로 100부 한정판으로 나온 희귀본입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김기림 선생은 1936년에 나온 이 시집을 두고 “백석은 한 권의 시집을 실로 한 개의 포탄을 던지는 것처럼 새해 첫머리에 내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그 마음은 저에게도 같아서, 백석 시집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이어져, 결국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베껴 쓴 가본으로라도 가지려 했던 것이지요. 백석의 시는,지금 읽어도 문장이 길어지더라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호흡을 이끌어나가는 강점을 가진데다가 묘사를 기막히게 해내서 감탄이 나옵니다. 이 정확한 호흡은 동시에, 모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어에 대한 그 나름의 의심을 촉발시키면서 형성시킨 정확함이기에 더더욱 그렇지요.
정지용 선생의 『정지용 시집』은 1935년 10월 27일에 출간되었는데, 저뿐만 아니라 그 당시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읽었어요. 더군다나 문단의 여러 문인들도 호응했습니다. 시인 모윤숙 선생의 경우 동아일보1935년 12월 2일자에 「정지용 시집을 읽고」라는 서평을 실었어요. 김기림 선생도 잡지 《조광》의 이듬해 신년호에 모윤숙과 같은 제목으로 서평을 발표하며 격찬했고요, 변영로 선생도 《신동아》 신년호에 「정지용 군의 시」라는 서평으로 고평했습니다. 문단 안팎으로 그처럼 뜨거운 호응이 있는 시집은 많지 않지요. 저는 그 시집을 1936년 3월 19일에 구매했는데, 시집 내지에 그 날짜를 기입하고 시집의 빈 칸마다 제 감상 같은 것들을 끄적거려가며 두고두고 읽었어요. 정지용 시가 지닌 강점은 조선적 옛 모습을 모더니티 안에 담아내려 시도하고 또 상당 부분 그것을 성취해낸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전집을 살펴보면, 시편들이 저마다 문법적으로 정치하여 원전과의 비교 대조에 과민하게 열을 올리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서는 일일이 따져야 할 부분들이 있겠습니다만, 많은 이들이 선생님의 시어들을 표면상으로 그렇게 읽어올 만큼 조선어의 태생적 자연스러움을 잘 지켜낸 맑은 시라고 이야기하곤합니다.
윤 동 주 많은 분들이 ‘순정함’이라는 말로 제 시를 표현해주시더군요. 그러한 시선이 다 사랑과 관심의 한줄기임을 알기에, 저는 그저 가만히 감사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환해지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글쎄요, 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 시의 순정함……, 저는 이런 것들을 과신하거나 맹신하는 의미에서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맑다’고 표현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굉장히 일차원적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제가 순정한 언어로 시를 쓸 때 그것이 정말 순정한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고정되지 않은 그 운동 상태야말로 제 시가 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보해줍니다.
개인적인 고민에서 여쭙는 것인데, 그렇다면 ‘서정’이라는 용어 역시 그런 것입니까?
윤 동 주 서정이 뭡니까? 한자로 抒情, 敍情이고, 그 의미는 사실 영어 lyric poetry의 역어로서 ‘선경후정’ 같은 한시(漢詩) 창작방법론의 용어를 빌려온 것이지요. 원래의 용어인 서양의 lyricism이 지닌 정의 외에 동양인이 그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가
정하는 또 다른 의미가 착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번역을 통하여 근대를 만난 당시 조선의 사회역사적 정황을 보건대 문화적 식민지에서의 개념의 혼종성/잡종성을 필연적으로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조선 말고도 일본과 중국에서조차 이 두 가지 한자어가 혼용된 저간의 사정을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러 논자들에 의해 그 무렵에도 이미 ‘서정’이라는 용어를 정치적 명징함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던 것이군요.어느 학자는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schreiben, ist barbarisch)”라는 말이 오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어에서 시문학 전반을 일컫는 ‘시(Gedicht)’를 번역하면서 ‘서정시’라는 단어로 슬쩍 바꾸어 쓰는 등 원용됐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도르노의 용어가 ‘서정시’이려면 선생님 말씀대로 ‘lyrisches Gedicht’ 혹은 ‘lyrik’라고 썼어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그러면서 그 학자는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라는 참사를 겪으면서 인간성이 말살된 비극 앞에서 시를 포함한 문학이 무슨 의미를 지닐수 있느냐며 회의하는 뜻으로 저 문장을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윤 동 주 다소 희한하게 들리는군요. 제가 공부할 무렵에 아도르노는 소개되지 않았는지 저는 그를 연전시절이나 일본 유학 시절에도 접한 적은 없습니다. 독일어 공부도 따로 하지는 못했고요. 그렇지만 모든 시는 서정시죠. 근래에는 한동안 모든 시가 메타시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시는 서정시일 수밖에 없고, 이는 시가 시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잘 알려진 국어학자 정열모는 1927년 『한글』 1권 2호에 실은 「조선어연구의 정체는 무엇?」이라는 글에서 “체계를 갖춘 문법에 의해 통일된 언어가 국어”라는 논증을 펼침으로써 조선어가 국어일 수 있다는 것을 개진했습니다. 조선어가 국어이기 위해 정치적 독립보다 언어학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국어가 될 수 있다는 근대적인 주장입니다. 특히나 여기서의 ‘정치’는 ‘현실정치’의 의미입니다. 서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시에서 서정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서정이라는 용어 자체가 워낙 많이 원용되다 보니 사람들이 그 개념을 오해하곤 막연하게 거부감을 보이는데, 구태여 작위적으로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문학적 분석의 이론적 틀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더불어 서정이라는 것의 개념을 원용하는 이들도 자중해야겠지요. 서정은 그저 매체에서 표상된 이미지로서의 ‘인간애’ 혹은 ‘자연에의 순수한 경탄’ 따위의 내용만 수용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혹자들은 그것이 단순한 것이며 좋은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단순하고 좋다기보다는 일차원적이고 막연할 따름입니다. 잘 읽힌다는 상대척도를 시/문학의 절대척도인 것마냥 만능으로 취급하는 것과 비슷한 오류지요.
실제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아도르노에게 모든 시는 서정시에 다름 아니더군요. 미(美)에 대한 아도르노의 견해를 참고하자면 미에는 부정성이 포함될 수밖에 없어서, 서정이라는 개념 역시 이 같은 숭고를 꺼내는 한 작업의 일환입니다. 앞서 거론한 ‘순정함’ 같이 선생님 시의 특징으로 파악되는 개념들은,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보면 더 깊이 있게 읽어낼 수 있겠군요.
윤 동 주 물론입니다. 제 시에 그만한 깊이가 있겠는가마는, 시의 본질로서 내재한 서정의 개념을 저차원적으로 원용하지 않고 읽어낸다면, ‘순정함’이라고 말씀하신 여러 논자들의 이야기도 새롭게 읽어낼 수 있겠습니다. 제 시의 ‘순정함’ 또한 그저 피상적인 영탄들로 읽히는 폄훼적인 시선을 피할 수 있겠지요.
● 선생의 말씀은 한마디마다 웅숭깊고 사려 깊은 통찰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겉보기에만 ‘쉽고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로 시를 쓴 시인인 탓에 그와 그의 시에 대해 느낄 법한 오해를 걷어내기에 충분했다. 오해를 걷는 것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 언어의 ‘단순함’과 ‘간결함’이랄지 ‘순정함’ 같은 개념에 대한 범속한 매도와 오판을 숙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선생의 성장사와 시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들은, 우문(愚問)을 마냥 탓하지만 않고 스스로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것이 ‘감화’라는 힘인가 싶어 새삼 그의 전집을 읽는데, 문득 한 자 한 자 쉽사리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화적으로 원용되고 거듭 상품화되는 그의 대상화된 시편들을, 보다 더 존중하는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날을 꿈꾸게 되었다. 그것은 사실인즉슨 여느 시인들이라도 가질 법한 기대 일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시는 시일 수밖에 없다는 자명하고도 정치한 결론을 몇 번씩 되새겨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