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여기서 먼가요?
글 김나정 ㅣ 소설가, 극작가. 1974년생
소설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 『멸종 직전의 우리』 『구야, 조선 소년 세계 표류기』
『꿈꾸는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저서 『박완서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김나정 희곡집』 등
희곡 데뷔작은 학교 과제였다.
소설을 쓰려고 끙끙대다가
희곡수업을 들었다. 소설의 구조를
짜고 대사를 쓰는 데 보탬이
될까하는 음험한(?) 의도에서였다.
세계 명작 희곡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희곡 한 편만 제출하면 된다니
소풍가는 심정으로……
“실수도 없지 않았지만, 애정의 결실”이었노라고, 조심조심 말해본다.
2010년 12월 5일. 신춘문예 접수 마감일.
아침부터 부랴부랴 원고를 손봤다.
오후 4시. 출력하고 원고를 훑어보았다.
제목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
이라니…… 허전했다. 내 딴엔 ‘恐’, ‘空’, ‘圓’, Ball 까지 <공>이란 말에 우겨넣었다. 과욕이 부른 밋밋한 결론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무제(無題)가 나으려나. ‘인간’이란 명찰을 붙여서 입학식에 보낼 순 없었다.
고쳐야 했다. 우체국이 닫는 6시까지 2시간가량 남았다. 하지만 초고를 쓴 뒤 3개월 동안 붙여놨던 간판을 바꿔 다는 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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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한다. “죽어서도 자식을 지배하는 부모”와 “살기 위해 부모를 죽인 자식.” 죽음으로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다. 죄책감과 후회, 미움이 남아 있다면 아직 서로에게 살아 있는 거다. 마음에 뿌리내린 걸 뽑아내려면 살점을 뜯고 피를 흘려야 한다. 가능한가? 끊어낼 수 있나? 그런저런 생각을 눈덩이처럼 뭉친 <공>이었다. 놓기 어려웠다.
제목을 붙든 지 1시간이 지났다. 발등에 불이 타오르고, 커서는 발을
구르고, 괴상망측한 제목들이 왔다가 사라졌다. 초조해하다가 벌컥, 화가 났다. 지옥에서 돌아와서까지 자식의 발목을 잡는 작품 속 부모에 대한 분노, 죽은 부모를 불러내 용서를 청하는 자식의 집착. 뭘 더 어쩌자는 거냐? 놓아줘라. …… 제목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기서 먼가요?>
끝까지 제목에 시비를 거는 작가에 대한, 작품의 분노까지 보태진 제
목이었다.
프린트한 뒤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이게 문제였다). 전력 질주하여 성 북우체국에 5시 45분에 도착했다. 우체국 안은 김장김치를 택배로 부 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방으로, 해외로 길 떠나는 상자들. 김치줄에 끼어 등기 우편접수를 마쳤다. 우체국을 나서자, 등에 날개가 돋았다. (홀가분함이 아니라, 허전함을 느껴야 했건만) 비로소 숙제를 마친 기분.
나의 희곡 데뷔작은 학교 과제였다. 소설을 쓰려고 끙끙대다가 희곡수업을 들었다. 소설의 구조를 짜고 대사를 쓰는 데 보탬이 될까하는 음험한(?) 의도에서였다. 세계 명작 희곡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희곡 한 편만 제출하면 된다니 소풍가는 심정으로…… 그러나 첫 번째 작품에서 덫에 걸렸다.
베르나르마리 콜테스의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환장할 작품이었다. 머릿속으로 목화송이가 눈 뭉치처럼 뭉텅뭉텅, 목화송이는 벙어리 같은데 비명소리가 들리고, 목화송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주먹질 같고, 침묵 속의 외침, 흰 빛 속의 핏빛이 뒤범벅되면서 마음이 질척질척해졌다. 첫사랑이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연극반이었다.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연극은 벅찬 상대였다. 일단 재능이 없었다(무대 공포증, 대사 버퍼링). 연극이 너무나 매력적인 것도 문제였다. 나를 잡아먹을 것같았다. 불 뿜는 용을 단칸방에 키우잔 거냐. 감당할 수 없었다.
사랑해서 헤어졌다.
십 수 년이 흘렀다. 돌아온 탕자가 되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희곡으로 무대에 서고 싶었다. 마음은 무성한데, 머리는 공터였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윗집에서 못질을 하거나 공을 튀겨댔다. 음모와 피해망상, 마감 공포 속에서 망치를 든 얼굴과 공놀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하다 보니, 글이 풀렸다. 초고를 서너 번 고쳤다. 한 편만은 꼭 완성해보고 싶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연락이 오지 않으니 떨어졌구나, 싶었다. 새해 첫날, 떡국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떤 작품이 당선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현상수배 포스터부터 눈에 들어왔다. 이목구비 대신 물음표가 덩그마니 들어간 실루엣.
‘작가를 찾습니다’
이것은 뭔가요? 훗훗. 스크롤바를 내리는데…… 내렸는데, 첫 줄부터 낯익었다.
심사평부터 찾아 읽었다. ‘주소와 연락처가 없는 원고’, ‘수소문해도 나타나지 않는 작가’ 는 바
로…… ‘나’인가?
잠시 생각했다. 황당, 당황과 환희가 일초씩 간격을 두고 밀려왔다.
신문사에 자수했다. 문학담당 기자 부부가 연말에 원고를 파일로 만드느라 고생했다는 얘길 들었다. 송구스러웠다. 어쨌든 작품을 살려야 한다고 애써주셨던 심사위원분들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기뻤다. 무대가 내 앞에 다시 열렸다.
여전히 연극은 매력적이면서 겁난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넣고 노래를 하는 심정 “여기서 먼가 요오~” 잡아 먹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저 맛있게 먹히길 바랄 뿐.
나의 데뷔작, “실수가 있긴 해도 여하간 애정의 결실.” 피와 살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조심조심 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