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순정함, 모어의 순정함,시의 순정함 - 윤동주 시인과의 가상 인터뷰
균형과 조화의 삶을 찾아서 - 행복한 의사를 위한 인문학
특집을 기획하며｜우리 시대 문학 상상력의 코드들 ①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②무엇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소설 속 우리 시대 아이러니의 대표 형상들 ③‘혼자’만의 자리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 「조용한 일」 중 변용
‘대전발 0시 50분’을 오르내리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일기,그 비밀의 방 두 번째｜알렉시예비치와 김종삼이 기록한 것 세 번째｜글과 리듬 네 번째｜드라이
제24회 대산문학상,한국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향한 출발 제24회 대산문학상｜예 / 심 / 평 2016 대산창작기금｜자유로움과 도발과 섬세함,젊은 작가들과의 조우 2016 대산창작기금｜수혜소감 및 심사평
장맛비가 이어주는 매듭, 님 웨일스와 김산과 이상(李箱)
프리웨이 5번, 워노-원,그리고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④탈조선의 어떤 감각,‘싫어서’라니
글 정은경 ㅣ 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70년생
저서 『디아스포라 문학』 『지도의 암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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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한국의 싫어서』는 이러한 문제적 현상을 가장 잘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한국을 떠나는 주된이유는 ‘싫어서’이다. 싫어서라니? 싫다고 조국을 등진다고?
싫다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고? 싫다고 다른 언어,다른 인종과 지난한 삶의 얼개를 다시 처음부터 할 수 있다고?
수년전 ‘한국문학에 나타난 외국 표상’이라는 기획주제에 대해 다음 세 가지의 비유적용어로 정리한 적이 있다. 첫째 이국 공간을 일종의 서사적 장치로서 활용하는 ‘경제자유구역’. 이 경우 중국을 배경으로 한 고전문학에서도 볼 수 있듯 지역 특성이나 이미지는 실감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대중매체나 관광을 통해 확보된 ‘검증된 공산품’처럼 기능적으로 실현된다. 둘째 ‘야생보호구역’. 이때 ‘타국’은 낭만주의 또는 엑조티시즘의 결과물로, 여전히 ‘지금-여기’의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도피와 동경의 장소로 등장한다. 셋째 ‘공동경비구역’, 디아스포라 작품에서 볼 수 있듯, 현실적 힘들이 쟁투하는 핍진한 삶의 현장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했던 ‘탈국가적 상상력’은 월경의 일상화와 더불어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보편적 현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수년 전 다소 도식적으로 분류했던(독자적이 아닌,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 세 가지의 경우는 좀 더 진화(?) 발전하여 한국문학의 또 다른 층위와 감각을 보태고 있다.
가령, 정지돈을 비롯한 후장사실주의 작가들의 상호텍스트에 등장하는 숱한 이국 공간, 그리고박민규, 천명관 등을 비롯한 한국 작가들이 담고 있는 무국적 공간과 외국, 한층 확대·심화되어형상화되고 있는 내외국의 디아스포라 현실들.
이즈음 소설의 ‘탈국가적 상상력’이 가까운 과거와 차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첫째 더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탈국가’를 탐색하고 있다는 것, 둘째 과거 대중매체의 이미지로서의 외 국에서 벗어나 좀 더 많은 ‘실감’이 얹혀지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과거의 타율적 탈조선에서 벗어나 ‘자율적 선택’으로서의 엑소더스의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 중국, 중앙아시아의 ‘한민족, 동포, 교포’라는 범주에는 과거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기의 유산으로서 ‘조국에서 쫓겨남’, ‘징용과 난민’ 등의 타율성, 강제성이 함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조국애’, ‘고국’ 등의 노스탤지어라는 구심적 정서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제 ‘탈조선’의 감각은 국민국가라는 것이 절대적 운명이 아니라 개인의 자의에 의해 얼마든지 선택 가능한 것이 라는, 취향일 수도 있다는, 하나의 문제적 층위를 더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장강명의 『한국의 싫어서』는 이러한 문제적 현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한국을 떠나는 주된 이유는 ‘싫어서’이다. 싫어서라니? 싫다고 조국을 등진다고? 싫다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고? 싫다고 다른 언어, 다른 인종과 지난한 삶의 얼개를 다시 처음부터 할 수 있다고? 과거 한민족 유민들에 비하면, 언뜻 이러한 발언은 ‘된장녀’나 ‘김치녀’로 비유되는, 궂은일은 마다하면서 낭비적 소비감각을 지니고 있는 젊은이들의 철없는 투정으로 들릴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위의 언급한 세가지를 참고삼아 달라진 지점들을 조감해보도록하겠다.
첫째,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영역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이주노동자나 탈북자의 현실, 재외한 인들의 증언은 외부자가 아닌 ‘서벌턴’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더하게 되었다. 가령, 김재영이나 공선옥, 손홍규, 이혜경 등이 다루었던 이주노동자,정도상의 『찔레꽃』의 탈북자들은 ‘우리’의 시선으로 그린 ‘타자’의 재현이었다. 전면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즈음 탈북자와 디아스포라 현실을 직접 증언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금희의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 2015) 이다. 금희는 중국의 조선족으로 한국등지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다가 장춘에 정착,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이다. 금희소설의 ‘조선족’이나 ‘탈북자’들은 ‘우리들’이 보았던 ‘그들’과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타자’를 재현하는 작가의 시선에 ‘도덕적 책무’나 선입견에서 비롯된 동정이 연
민, 혐오와 적대라는 ‘거리두기’의 감정이 적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금희의 인물들은 훨씬 더 많은 실감과 입체성을 입고 다가온다. 가령 「옥화」의 탈북여성인 ‘옥화’와 ‘여자’는 수동적인 희생양이나 낯선 이방인의 단면적 모습에서 벗어나 풍부한 육체성을 입고 독자를 육박하고 곤혹스럽게 하는 인물이다. 화자인 ‘홍’은 조선족으로 교회에 서 만난 ‘북녘 여자’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여자’는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듭 물질적 도움을 청하면서도 갚을 의지도, 미안함이나 감사함도 표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인물이다.
사천을 요구하는 여자에게 홍은 인색한 마음이 들어 ‘삼천’으로 마무리 하려는데, 여자는 “그돈 쪼꼼 더해주시면 안되갔시요?”라고 홍을 붙잡는다. 그 뒤 홍은 꿈을 꾸며 괴로워한다. 꿈속에서 “왜 내가 줘야 하지?”라고 홍이 묻자 그녀는 “가졌으니까”라고 답하고 “내도 한국 가서 돈많이 벌어바라. 내는 너들처럼 안 기래”, “그 잘난 돈, 개도 안 먹는 돈, 그딴 거 쪼꼼 던재 준거내 한나도 안 고맙다요”라고 일갈한다. 홍이 여자의 이러한 태도에 당황하는 것은 이 뻔뻔한 요구가 우리의 태도의 어떤 본질을 건드리고 있으며,이 사태의 지평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난민, 유민 주제에 도움을 당연
시하고 주인을 겁박하다니’와 같은 우리들의 분노는 탈북자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혜적 태도, 혹은 타자화하는 우리들의 본심을 들춰낸다. 또한 그 당당함은 ‘원주민과 이주민, 부자와 빈자, 갑을 관계’의 당연함에 대해 심문하면서 그것을 불러온 여러 사회현실의 불합리를 환기시킨다.
금희의 소설에는 이 밖에도 “눈만 뜨면 일, 일하는 것 외에 그 나라 일반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는 돈벌이 기계 같은 생활”을 하는 한국에서의 고된 노동, 그리고 중국에서의 한족, 조선족, 탈북자의 위계가 한국에서 뒤바뀌는 형국(「노마드」)을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이제껏 우리가 놓친 결들을 핍진하게 되살려놓고 있다. 디아스포라 소설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있는 문제작들이다.
둘째, 소설적 장치로서든 낭만주의의 결과물이든 ‘이국’을 배경으로 하는 일련의 소설도 과거와는 다른 지점들을 담고 있다. 즉 지구화의 가속화와 더불어 계몽된 한국 소설은 ‘이국공간’이란 그 호명만으로도 가능했던 ‘동경과 낭만’의 ‘엑조티시즘’에서 벗어나 어떤 실감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탈조선의 귀착지가 어디이든, 뉴욕혹은 상하이, 부다페스트, 테헤란, 이스탄불, 시드니, 발리, 알라스카에 상관없이 과거 동경과 상상의 폐쇄 공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열린 탐색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 예로서 김솔의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를 살펴보자.
이 작품의 배경은 암스테르담으로 G와 Y라는 연인의 이별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한국어 창작이라는 것 이외에 대한민국 국적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이다. 배경은 물론이거니와 작중 인물도 네덜란드인이고, 동거나 이별 직전의 가라지 세일이나 이웃과의 관계 등에서도 모든 것이 ‘암스테르담’ 소속이라는 것을 거듭 보여준다. 서사적 얼개는 네덜란드인 두 명이 만나 그쪽 풍속에 맞게 동거하고 바람피우고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다면 왜 ‘암스테르담’인가? 왜 서울이나 북경이 아니란 말인가? 작품에서 거듭 언급되는 “생명과 자유 이외의 금기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에 힌트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네덜란드가 마약, 성매매는 물론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생명과 자유 이외의 금기 없는’ 암스테르담이라는 유토피아적 공간에서 ‘사랑’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제약이 없다면, 우리들의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보다 훨씬 더 멋지고 아름답게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G와 Y는 코카인을 흡입하다가 만나 “코카인보다는 서로의 이야기와 육체에 점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어” 동거하게 된다. G와 Y는 둘 다 여성이지만, 암스테르담에서 문제될 것은 없다.
사랑을 얻은 이들은 환각을 끊고 일상을 이어가 던 중 서로 다른 애인을 만든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연인들답게 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를 계기로 다시 서로에 대한 사랑이 불타오르기도 하고, 애인을 떠나보내지만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Y 몰래 G가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어쩌면 그것과 관련 없이 그들의 사랑의 끝은 시작과 더불어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의 결별이 사랑의 유통기한이라고 하는 ‘3년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G와 Y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 코카인을 하고 동성애를 하고, “시민연대협약”이라고 부르는 동거를 하고, 바람을 피우고,성매매를 하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커밍아웃이나 동성결혼을 선택하는 대신 우리와 같이 이별을 택한다. 작가 김솔은 이를 “암스테르담 특유의 아이러니”라고 명명한다. 그렇다. 암스테르담에서도 ‘우리의 사랑’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욕망의 실패와 불완전함이다. Y는 G의 임신이 전통적인 가족제도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자신의 히피적 성향과 맞지 않는다고 그녀를 단념한다.
작가는 이들 사랑의 실험에서, 한국의 우리들이 ‘빗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문제들을 짚어주고 이들을 다 열어젖힌다.
결혼은 마치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없는 미궁과도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분명하고 간단한데 반해 그것의 밖으로 나오려면 배우자와 국가를 모두 적으로 삼고 사회적 죽음까지 각오한 채 새로운 출구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궁 밖은 또 다른 미궁의 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생은 어느새 황혼에 물들어 있고 체념과 망각의 습관에 사지가 붙들려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지 못한 채괴뢰처럼 제자리에서만 흔들릴 따름이다. 미궁은 영원한 감금을 위해 고안된 장치다. 반면 동거는 입구와 출구가 명확히 구별되는 미로에 비유할 수 있을 텐데, 미혹의 고통이야 미로 속이든
미궁 속이든 다를 바 없겠지만, 미로 안에 갇힌 자들은 출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여, 언제든 그것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상실감은 완전히 극복되고 인생의 새로운 시공간이 펼쳐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겨울의 눈빛 : 제4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4, 290쪽
가령 인용문에서처럼 감금의 ‘결혼’ 대신 자유로운 ‘동거’를 연인들에게 선사하지만, 그 동거의 끝에서 G는 ‘오직 연대 의식만으로 서로의 삶을 연결시키기엔 그것의 경계가 너무 모호하다는 푸념’을 늘어놓고,결국 이들은 ‘상대에 대한 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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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호주 감행은
철저히 신분상승 욕구에서 비롯된
세속적인 것에서도 다소 비켜 있으며,
그렇다고 세계시민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낭만적 도피에서도 어느 정도 비켜나 있다.
계나의 지향점은 무엇이고
한국의 무엇에 대한 반동인가.
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사랑에 관한 한 수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 같은 것은 없다는 것, 그런 쓸쓸한 결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은 호출되지 않았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한국의 싫어서』를 살펴보자.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의 주인공 계나가 호주로 떠난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중략)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 『한국이 싫어서』, 민음사, 2015, 10~11쪽
계나의 ‘싫어서’라는 탈조선은 확실히 탈북자나 이주노동자, 난민의 국경 넘기와는 차별화된다.
즉 계나의 탈조선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취향에 의한 ‘삶의 방식’의 선택이다.
이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출세지향적 욕망과도 차별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녀의 호주 감행은 철저히 신분상승 욕구에서 비롯된 세속적인 것에서도 다소 비켜 있으며, 그렇다고 세계시민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낭만적 도피에서도 어느 정도 비켜나 있다. 계나의 지향점은 무엇이고 한국의 무엇에 대한 반동인가.
‘한국이 싫어서’라는 계나의 처지는 이즈음 헬조선을 외치는 청년들의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계나는 수도권의 대학을 나와 ‘W종합금융’이라는 곳에서 3년 동안 신용가드 승인 업무를 해왔다. 그러나 그녀는 숨 막히고 땀내 나는 지하철 2호선의 출퇴근길과 자신의 쳇바퀴같은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감지한다. 또한 강남에 거주하는 애인 지명의 대학 교수집안으로부터 무시당하는, 철저히 위계화되어 있는 신분구조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는 분화된 한국 계급사회에서 아무리 고생을 해도 자신의 2등 시민성은 바뀌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제자리걸음이라도 그만두는 날에는 끝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2등 시민성의 내용을 바꾸고자한다. 호주에서의 2등 시민, 알바 인생이 한국에서의 2등 시민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호주에서는 직장인들은 대개 4시에 퇴근하고, 버스기사와 신문기자의 월급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며, 1년에 한 달이라는 휴가를 얻을 수 있고, 병원비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호주 이민은 매일 매일 순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현금흐름성’의 행복, 즉 다음과 같은 다소간 낭만적 실존 방식과 관련이 있다.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중략)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거야.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 앞의 책, 152~153쪽
그러나 위의 우아하고 여유로운 삶의 방식을 충족시키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명의 지적대로 ‘변호사, 의사, 기업 임원과 같은 제대로 된직업’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회의 구체적 현실지형 에서도 일상의 모험과 쟁투는 벌어지게 마련이다. 계나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호주에도 지하철 2호선과 흡사한 닭장 셰어가 있고, 호주인, 서양인, 일본인, 남아시아의 위계가 있고, 유학생들을 착취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그러나 계나의 저러한 낭만적 지향이 호주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계나가 호주에서 ‘국외자’, ‘이방인’임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호주에서 악착같이 공부하고 일하지만 그것은 시민권과 영주권을 획득할 때까지 뿐이다. 그 뒤에는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악착같은 것은 없다. 이방인으로서 누리는 호주의 선진적 생활방식과 복지혜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계나의 ‘싫어서’라는 도피성 탈출과 호주 이민은 그녀의 저러한 낭만적 동경과 세속적 계산이 협상하여 만든 결과인 것이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국외자였다는 계나의 체념, 그리고 ‘이방인’의 수락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중략)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 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 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 앞의 책, 170쪽
계나의 저러한 의식은 국가, 정의, 민주, 진보등으로 구성된 근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조국이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 국민이나 일원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의 절대성을 상대화하는 이러한 개인주의는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결과이자 무엇보다 지구화 물결의 부산물일 것이다. 직장은 물론,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극적인 자유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유동하는 근대’에 착목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에 사는 주민들의 총체를 가리키던 ‘공동체’라는 말은 이제는 점점 공허하게 들린다. (중략) 끊임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
과 유토피아』, 한상석 옮김, 후마니타스, 2015, 9~11쪽
지구화 시대에 국가는 지구를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권력과 분리되어 구성원을 보호할 수 있
는 힘을 잃었다는 것,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개인은 이제 ‘자유인’이 되었지만 대신 불확실하게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선택’이라는 짐을 지고 그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 ‘한국이 싫어서’라는 계나의 탈조선이 ‘개념 없는’ 개인주의의 투정이 아닌, 우리가 당면한 지점이자 보편적 사태임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헬조선’은 양극화, 청년실업 등의 끔찍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 어떤 개인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안전과 안녕을 보장받을 수 없는, 네트워크가 구조를 해체하는 지구화의 결과라는 점에서 진짜 문제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