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과거는 그 지점에 항상 고정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추억이 필요할 때마다 등 뒤로 난 창을 열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과거는 오늘과 내일의 하루하루가 쌓여가는 만큼의 거리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비록 화선지처럼 얄팍한 나의 지적 세계라 할지라도 늘상 과거 속에서만 앞으로 나아가는가,라는 물음과 맞닥뜨렸을 때 그랬다.

움직이는 과거를 오랜만에 찾아 나섰다. 다락방의 외양은 그대로인 듯 보였으나, 그 안의 정황은 타인의 밀실인 양 낯설었다. 다락방이란 지난날, 그러니까 사회로 뛰쳐나가기 전까지의 칩거 장소를 의미한다. 세상을 두 발로 걸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정신적 다락방이 있게 마련이다. 지상에 준비된 자궁이나 다름없는 자기만의 방에서 섭취하던 자양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때는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마치 웅크리고 있는 일이 움직임의 전 단계이듯, 막연하고 불안한 기운에 억눌려 있는 다락방 신세가 자유를 가져다주리라 믿었다. 스스로 걷고 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던 시절의 읽을거리란 선택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약한 내 정신세계의 궤적일지라도, 문득 되새길 기념비의 영광을 그런 우연의 대상에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먼지를 털고 골라낸 표석 하나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다. 「현대문학과 사회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나왔는데, 다음 해 김우창 선생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비로소 읽게 되었다. 매력적인 그 제목은 한용운을 위한 수사였다. 자아의 진실과 세상의 허위 속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세계관의 지식인이 살아가는 배경을 궁핍한 시대라고 한다면, 한용운은 마른 향기나마 흩뿌려 우리를 각성케 하는 국화꽃이라고 정언했다.

따지고 보면 그 책 한 권은 문학평론가 김우창이 그때까지 쓴 글들을 모아 놓은 평론집에 불과했다. 74년에 나온 정현종의 시집 『고통의 축제』에 붙인 해설도 포함돼 있었고, 65년에 탐구신서의 여섯 번째 문고판으로 초판을 선보였던 김종길의 『시론』에 대한 비평적 서평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서슴지 않고 뽑아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책의 내용이 나를 길러준 것이라기보다는 책의 분위기가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일의 시작은 결단을 요구한다.” 서문의 한 문장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사람이 행동을 통하여 현실에 개입하려고 할 때, 상황은 늘 사람의 힘보다 크다.” 미묘한 문장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제목 아래 배치되고 나면, 읽기만 해서는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없었다. 저자 스스로도 “난해한 인상을 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썼다.

읽기만 해서는 안 되고, 깊은 사색의 바퀴가 뒤따르게 해야 친숙해질 수 있는 게 그의 글이었다. 읽으면 저절로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가면, 문득 쓰고 싶은 욕망도 일었다. 그런 식이었다. 김우창의 글은 읽는 즐거움보다 글쓰기의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분명히 내게는 그랬다. 나도 저런 글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그 뒤로 줄곧 떠나지 않았다.

81년에 두 번째 평론집 『지상의 척도』가 발간됐고, 계속하여 그의 길고 짧은 글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82년 신문에 쓴 칼럼은 나를 극도로 자극했다. 「창조적인 삶이 되게」란 제목 아래 첫 문장은 “창조의 조건은 자유이다”였다. 이성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을 후배 지식인들은 ‘강요하지 않는 페다고지’라고 표현했다. 어떤 조건만 형성해 준다는 의미였는데, 나를 사로잡은 것도 그런 느낌이었다. 젊은 시절 나를 흥분시킨 것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지적 분위기였다. 그 첫 번째 책이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어느덧 나도 이 따위 글이나마 쓰고 다니는데, 언젠가 나름대로 멋을 부린 글을 두고 고종석은 김화영 선생을 흉내 낸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의 짐작을 무참하게 짓밟아 통쾌하다. 김우창을 흠모하여 시작한 글쓰기가 다른 형태로 드러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