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5일. 녹음기는 준비하지 않기로 한다. 가방 깊숙이 노트와 볼펜을 집어넣긴 했지만, 그것을 꺼낼 순간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인터뷰’라는 이름은 어쩌면 구실일 뿐, 나는 선생을 뵙고 싶었다. 9년 만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가 출간된 바로 그날이다. 누구보다 먼저 축하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함께 간 출판사 직원이 초판 1쇄본 몇 권을 선생께 전달한다. 실물로는 처음 받아보신 『복희씨』다. 표지를 가만 들여다보는 선생의 표정을 나는 훔쳐본다. 이것이 선생의 몇 번째 책인지 헤아려보려다 그만둔다. 그것이 몇 번째 책이든, 막 인쇄되어 나온 자신의 새 책을 받아든 작가의 복잡한 기분은 비슷할 것이다. 온전한 또 하나의 세계. 스스로 만들어 낸 그 세계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의 실감은, 선생의 연배가 되어도 쉬 익숙해지지 않는 종류의 것일지 모른다.
영광스럽게도, 선생이 내게 첫 번째 사인을 해주신다. ‘정이현 님, 2007년 가을, 박완서’ 조금은 흘려 쓴 선생의 글씨. 소설 쓰는 사람이 된 뒤, 이런 저런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재작년 늦가을 현대문학상을 타게 되었을 때, 심사위원 명단에 선생의 성함이 있다는 걸 알았던 순간도 그랬다. 수상에 대한 기쁨보다 먼저 찾아왔던 건 놀라움이었다. ‘세상에. 박완서 선생님이 내 소설을 읽고 계셨단 말인가!’ 그리고 뒤이어 몸을 가눌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설익은 글을 함부로 내놓지 말아야겠구나,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선생을 뵈면, 아직도 무섭고 또 부끄럽다. 그리고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환해진다.
 

▲     © 운영자

지난 봄날이었다. 아치울 마을의 선생 댁을 찾아뵙는 일행에 끼게 되었다. 시상식장 말고 선생을 가까이서 뵙기는 처음이었다. 대문에 발을 들이면서 나는 좀 긴장했을 것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으로 할 때 누구나 그렇듯이. 봄꽃들이 무더기로 만개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꽃나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향기 짙은 흰 라일락을 비롯해서 보랏빛 아이리스, 불꽃 같은 영산홍, 간드러지게 요염한 유도화, 홍등가의 등불 같은 석류꽃, 숨가쁜 치자꽃, 그런 것들이 불온한 열정-화냥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다. (「그 남자네 집」 중에서, 『친절한 복희씨』)

선생의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그 꽃들의 이름이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거실의 커다란 유리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그 눈부신 봄빛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것만 똑똑히 기억난다. 그것은 강렬한 매혹의 느낌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기 전에 선생은 아마 차를 한 잔 내주셨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날 때부터 도시인이었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선생 앞에서 불현듯 그 문장이 떠올랐다. 선생은, 한참 아래의 후배들에게 쉽게 말을 놓는 분이 아니었다. 이름 뒤에 꼬박꼬박 ‘-씨’ 라는 의존명사를 붙이셨다. 선생이 조금 카랑카랑하고 가느다란 그 목소리로 ‘정이현 씨’ 라고 부르실 때, 나는 본능적인 편안함을 느꼈다. 깍듯하고 정갈한 태도, 품위 있는 거리감은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예의에서 나온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깔끔한 성품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제멋대로인 인간에게, 진심으로 닮고 싶은 어른이 생기다니.
한 번이라도 지척에서 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선생은 반짝반짝 빛나는 분이다. 정말로, 모르는 게 없으시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 예술영화 전용극장에서만 개봉 중인 제 3세계 영화, 인기리에 방영 중인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까지 속속들이 꿰고 계신다. 어떤 화제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 아름답던 봄날, 선생은 스페니쉬 옐로라는 집 외벽 색깔의 이름을 가르쳐주셨고,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마당에 바비큐를 하러 오라는 말씀도 하셨다. 올 가을께 책을 묶었으면 하는, 동행했던 출판사 직원에겐 좀 망설이시다가, 그렇게 해보자는 대답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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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들이 떨어지고 여름이 깊어가는 동안 내가 무얼 했던가. 소설집이 나왔고, 이런 저런 자리에서 내 소설에 대해 뒤떠들고 다녀야만 했고, 흐릿한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새 장편연재를 시작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나는 더 이상 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게 아닐까하는 은밀한 뒤숭숭함 속에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가을의 한가운데 아치울의 노란 집을 향해 달려가면서, 내가 그곳을 마음 깊은 데 담아두고 있었음을 알았다.
빳빳한 새 책에 사인을 받은 뒤, 책장을 천천히 넘겨본다. 이미 문예지를 통해 읽었던 소설들이 대부분이다. 우연히 받아든 문예지에 선생의 새 단편이 실려 있으면, 당연히, 가장 먼저 읽곤 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야금야금 아껴 읽으면서 많이 웃고 오래 감동했으며 또한 고백컨대, 맹렬히 질투했다.
“선생님, 소설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말솜씨가 원망스럽다. 선생은 설핏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는 쓰면서 내가 재미있지 않으면 못 쓰는 걸.”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멍해졌다. 나는 왜 문학이 고통의 다른 이름이라고만 여겨왔을까. 낡은 빨랫감 쥐어짜듯 영혼을 사정없이 비틀어 짜려고만 들었을까.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 중에서, 『친절한 복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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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중에서, 『박완서 문학앨범』, 웅진출판)
우리는 차를 타고 구리시 수석동의 한정식 집으로 이동한다. 봄에 함께 갔던 그 집이다. 나는 지난 봄 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수다를 떤다. 일행들과, 술도 한 병 나누어 마신다. 과실주가 유난히 향긋하다. 그렇다. 오늘은 한 작가의 새 책이 지상에 나온 날이다. 명실상부한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 살아있는 신화. 옆 테이블의 주부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 박완서 선생님이야.” 선생님, 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한다. 괜히 내 어깨가 으쓱해진다.
선생이 유달리 그 식당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널따란 정원 때문일 것이다. 파라솔 의자에 앉으면 바로 옆에 거짓말처럼 한강이 깊고 그윽하게 흘러간다. 강물 안에 구름들이 둥둥 떠간다. 구름의 흰 무늬들을 바라보며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맛이 각별하다.
소설에 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여쭙지 않는다. 원래 표제작으로 마음에 담고 계셨던 건 「대범한 밥상」이었는데, 거리에만 나서면 ‘**밥상’이라는 간판의 식당들이 눈에 뜨이셨다고 한다. 선생의 완벽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연상되는 ‘친절한 복희씨’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선생은, 어쩌면 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친절함’이라는 가치에 대해 새롭게 정의내리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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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갈아타고 광화문 시네큐브에 영화 보러 다니시는 얘기도 하고, 미장원 얘기도 하고, 선생이 좋아하는 남자배우들-조인성과 비, 주진모 등도 차례로 화제에 오른다. “그럼 <미녀는 괴로워>를 꼭 보셔야 해요. 주진모가 얼마나 섹시하게 나오는지 몰라요.” 나는 호들갑스레 정보를 전해 드린다. “죽어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순간에,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런 응석어린 질문은 드리지 않는다.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소설을 써오신 분 앞에서 감히 입 밖에 내놓을 문장이 아니다. 두런두런 편안하고 고요한 오후다. 맑았던 하늘이 조금씩 흐려져 갔지만, 여름부터 잔뜩 오그라들었던 내 마음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다는 걸 남 몰래 나만 눈치 채고 있다. 우리는 카메라를 향해 나란히 선다. 사진을 찍어주시는 분이, “두 분 다 참 착해 보이게 나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럼. 우리 원래 참 착한 사람들이야.” 선생이 내 쪽을 향해 눈을 살짝 찡긋 거리신다.
다시 아치울로 돌아왔을 때, 집 앞에 웬 중년여인이 서 있다. 무작정 선생을 뵙기 위해 찾아온 팬이다. 그녀는 내 팔을 붙들고는 묵직한 종이봉투를 선생께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선생이 나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먼저 집 안에 들어가신 선생께 그 말을 전하면서 젊은 일행들은 일제히 선생을 만류한다. “누구인줄 알고요. 나가지 마세요, 선생님.” “어머나, 좀 내다 봐야겠다.” 선생이 담장 너머를 바라보신다. 마침 마당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 선생은 이내 신발을 신으신다. “비가 오잖아. 안 되겠어. 사람이 저리 기다리는데, 내가 잠깐만 나갔다 올게.” 그게 바로 선생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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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라는 이름은, 한국문단의 신화인 동시에 누구보다 생생한 현역이다. 이런 선례는 몹시 귀하다. 당신 이름이 두르고 있는 어떤 권위에도 휘둘리지 않고, 선생은 그저 걷고 계신다. 지난 시간의 그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때론 흔들리며 때론 뚜벅뚜벅 오늘도 새로운 길을 만들고 계신다. 『친절한 복희씨』가 출간되자마자, 성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독자들은 정직하다. 내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어루만져주는 그 손길을 눈 밝게 알아본다.
아직도 이토록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거장이라니. 한국문학의 축복이란 말은 명백히 이런 자리에 쓰여야 옳다. 지나가는 말씀처럼, 이번이 마지막 작품집 아닐까, 라고 하셨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음 작품을 목 빼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선생께 꼭 알려드리고 싶다. 그날 아치울 마을에 다녀온 뒤 내가 새 장편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아주 조그맣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