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꼼꼼하게 들여다본 적 없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대산문화』 편집부에서 보내주었다. 내가 써야 할 독후감은 장 코르미에가 쓴 『체 게바라 평전』. 2000년 교보문고 종합 19위에 오른 책이다.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 해, 내가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같은 책은, 제목과 똑같은 삶을 산 덕분에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늘 쓸 『체 게바라 평전』이나 도올 선생의 『노자와 21세기』같은 책은, 그 뒤 사오 년이 흐른 뒤에야 겨우, 건성으로라도 읽은 책들이다. 그렇다면 그 해, 나는 어떤 책들을 읽은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책은 읽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걸어 다녔던 기억뿐이다. 취직을 해야 하나,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하나, 뭐 이런 생각들을 조금 한 것도 같다.
일생이 IMF인지라, 남들에게 IMF가 찾아오든 말든, 대우가 부도가 나든 말든, 상관없이 나는 계속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소위 등단이라는 것을 하기 일이 년 전엔, 주로 자서전 대필을 많이 했다. 정권이 바뀌고, 총선이 다가오고, 지자체 선거가 다시 돌아오는지라, 여기저기 책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알고 지내던 출판사 사장은 나를 조수석에 앉힌 채 그 사람들을 만나러 대구도 좋고, 광주도 좋고, 춘천도 좋고, 계속 뽕작 테이프를 갈아가며 시속 백오십 킬로미터로 달려갔다. 내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책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다음, 빠르고 신속하게, 그 사람이 쓴 듯, 일생을 축약 압축해주는 것. 보름이면 뚝딱, 한 사람의 일생이 책으로 완성되어 나왔고, 나는 사장에게 원고매수만큼의 돈을 받았다. 기계처럼 뚝딱, 형용사와 부사를 많이 넣고, 간간이 스릴과 액션을 넣어주면, 의뢰인들은 입을 딱딱 벌리며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아, 내가 정말 그랬죠. 이건 딱 나라니깐요.”
의뢰인들의 기억과 약력은 때론 논리적이지 못하고, 또 때론 과장되어 있었지만, 그 과장을 눈 감고 애드벌룬처럼 부풀려주는 것, 그것이 원고매수를 늘리는 가장 좋은 비결이었다. 모두가 과거엔 민주투사였고, 국보법의 희생양이었으며, 독재정권 타도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론 어땠는지 몰라도, 분명, 내 글 속 그들은 그러했다. 스펙터클이 따로 없는 인생들이었다.
 
 

▲     © 운영자

 

그런 전력 탓일까, 나는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것이 내내 힘겨웠다. 글을 쓴 사람과, 그가 인터뷰한 사람들이 쓰는 형용사와 부사가, 계속 마음속 저편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형용사와 부사들은 내 해석을 앞질러, 내 상상을 가로질러, 그 모든 것들 앞에 오는 것들이었다. 묘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풍경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형용사는, 때론 폭력이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한 인간으로서 그처럼 특별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또 있을까요? 아이들과 장난치기를 좋아하고 농담을 즐기면서도 어느 때에는 놀랄 만한 냉철함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체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행동하되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생각하라’는 베르그송의 멋진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낭만주의자,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체’와 같은 사람들이 역사라는 공간에서 버림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문장들은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없다. 해석은 이미 완결되었고, ‘체’는 곧장 신화의 세계로 진입해버린다. 설혹, ‘체’의 실체가 진정 신화의 세계에 근접해 있다 하더라도, 저자는 사력을 다해 그를 다시 인간의 세계로 끌어내렸어야 했다. 그것이 평전을 쓰는 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이다. 타당하고 평준화된 주석의 세계에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침묵의 그늘을 살피어 훈김을 불어넣어주는 일, 그것이 한 사람의 일생을 조망하고 해석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다. 『체 게바라 평전』을 쓴 장 코르미에의 문제는(그러나 나는 그가 순수한 마음에서 ‘체’에게 매혹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체’에 대해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윤리란,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데, 그는 ‘체’를 자신의 문장 속에 종속시키려 했다. 이는 ‘체’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다. ‘체’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계와 맥주 이름이 되어 세상에 팔리게 된 것 또한, 장 코르미에와 같은 윤리관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러니, 이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객체에 매혹되어, 객체를 종속시키고 마는 이 세계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라고 한다면 너무 추상적이고, 애매한 호명일까?

그러니, 나에게 이 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당연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소개된 ‘체’의 일기였다. ‘체’의 목소리가 날것으로 드러난 그 일기들은 ‘말줄임표’의 세계였다. 나무 아래에서 더듬더듬 씌어진 그 일기들의 지워지고 생략된 문장들을 상상하고 추측해나가는 일은, 그래서 가슴 아프고 눈물겨웠다. 거기엔 차마 말로 표현되지 못한, 이념 이전의 굶주림과 인간의 공포가 고스란히 배여 있었다. 비둘기를 잡아먹고, 자신을 태워준 말을 잡아먹는 세계. 그것들은 대개 단문으로 설명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도 더 생생한 묘사로 내게 다가왔다. 가만,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의 문장이 왜소했기 때문이었다. 문장이 왜소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형용사나 부사를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IMF여파가 계속 그 위력을 발휘하던 시기,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사실은 나름 의미심장하다. IMF가 긍정적인 차원에서, 그간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성장 제일주의와 물신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용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그것을 더욱더 공고하게 만들었던 시기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제 우리 사회의 ‘말줄임표’는 사라졌고, ‘내면’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것은 종속과 굴종뿐이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자본의 가치만을 꿈꾸며 달려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품을 수 있는 로망이란, 기껏해야 삼십 년 전,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게릴라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위무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 세계는 도무지 정면승부로 깰 수 있는 여지가 없으니까, 그 빈틈으로라도 어떻게…. 그것이 설령 자본주의를 배회하는 유령이라 할지라도, 우리 또한 유령과 다를 바 없었으니.
그 해부터, 나는 자서전 대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다. 의뢰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당한 교통사고가 주된 원인이었지만, 그 사고를 통해 최소한의 노동으로도, 그럭저럭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면, 애드벌룬 따윈 필요 없었다. 그런 문장들은 내 문장도 아니었고, 그들의 문장도 아니었으며, 오직 애드벌룬의 것이었다. 문장 사이사이에 놓인 침묵들에 대해 배운 것도 아마 그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나의 의뢰인들은 그 후 대부분 구속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