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 살 가을, 나는 한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 앉아 있었다. 모든 희망과 동경을 포기하자 거기가 세상의 끝인 듯 아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하늘의 신들이 땅에 내려와 농사를 짓던 시절,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의 시절만큼이나 아득하게 먼 세월 저쪽이다. 시립도서관의 창가 자리에서 창문을 등진 채 나는 책들을 읽었다. 어깨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뇌에서 세레토닌 분비가 왕성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20대 초반 내내 월경전증후군을 앓는 여자처럼 기분이 눅눅하고 우울했는데, 시립도서관을 다니면서 자연 치유되었다. 나는 갑자기 활력에 넘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내 몸속에서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활발해지며 무기력증과 불안감이 사라졌다. 아마도 충분한 일조량이 치유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내 핏속에 도파민 농도가 짙어지고, 혼자 걷고 있을 때 절로 웃음이 나오곤 했다. “우후, 그래, 난 뭔가를 이룰 거야. 뭐든지 잘할 수 있어.” 나는 세상의 천덕꾸러기, 불필요한 잉여인간, 큰 날개 때문에 어기적거리는 알바트로스가 아니었다. 그런 기분을 갖게 되니까 자꾸 웃음이 나왔다. 꿈꾸지도 않은 봉황새가 내 몸에 날아 들어온 것일까?
가끔 눈을 감고 몽환 속에서 바다를 보았다. 햇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둥근 바다. 내가 쓴 책 한 권을 들고 가서 그 바다에게 종일 읽어주고 싶었다. 그건 아무에게도 토설하지 못한 세상을 향한 내 유일한 꿈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말단 공무원처럼 시립도서관에 출근을 했다. 그것 말고는 할 일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양계장에서 평생 알만 낳는 닭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그 자리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을 천천히 읽었다. 어느 순간 감각중추가 마비되는 듯 강렬한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와 몸을 적셨다. 대마초를 처음 피워본 사람처럼 입가에 자꾸 웃음이 번졌다. 뭔가를 읽는다는 게 아편과 같이 중독성이 있다는 걸 그때 경험했다. 『시경(詩經)』을 읽고, 제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씌어진 실록들을 읽었다. 아주 깊은 정서적 안정감 속에서 니체와 미시마 유키오를 함께 읽고, 처음 소개된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의 얇은 산문집을 닳도록 읽었다. 김현과 김우창을 읽고, 김현의 안내로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들을 읽었다. 『몽상의 시학』과 『초의 불꽃』은 읽고, 또 읽었다. 바슐라르의 책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졌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좋았다. 해질 무렵이면 시립도서관을 나와 황금빛 잎들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삼청동 은행나무 길을 거쳐 광화문 쪽으로 허청허청 걸어 내려왔다. 오십이 킬로그램의 마른 남자의 눈에는 거리를 메우고 걸어가는 여자들이 다들 꽃처럼 예뻤다. 거리와 상점들의 조명등이 막 켜지기 시작한 광화문 거리가 꽃밭인 듯 휘황해서 나는 잠깐 동안 어리둥절했다. 나는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 들러 쓰디쓴 커피를 빈 위장에 부어놓고 온몸을 의자에 파묻은 채 고전음악을 들었다. 들었다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다. 내 전 존재를 음악을 향해 열어두었다. 음악은 제멋대로 내 몸속을 들락날락거렸다. 바흐와 모차르트와 말러와 비발디가 나를 방문하고, 파가니니와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들도 심심찮게 내 몸을 드나들었다. 부르흐의 콜 니드라이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비탈리의 샤콘느, 슈베르트의 가곡들도 가끔 들렀다. 그때 경험으로 말하자면 음악은 배고픈 상태로 들어야 명료하게 들린다. 음악은 내 영혼의 심지에 불꽃을 점화하곤 했다. 어둠 속에서 내 전 존재는 음악이라는 연료를 빨아들이며 홀로 타오른다. 어느 날 문득 시립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두 시인에 대한 작가론을 썼다. 처음 써보는 평론이었다. 그걸 각각 다른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리고 손을 놓고 있다가 신춘문예 마감 날 저녁 시 한편을 정서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하고 그 시를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나는 벌써 네 해째 신춘문예에서 낙방하고 있었다. 두 편 중의 하나가 동아일보에서 가작으로 붙은 「존재와 언어 ― 정현종론」이다.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써서 응모한 시가 조선일보에서 당선한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夢想(몽상)이여」이다.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두 신문사에서 보낸 당선통지를 받았다. 1978년 12월이었다. 아직까지 얘기하지 않은 비밀 하나. 그때 신춘문예 응모규정에 따르면 시는 세 편 이상 보내야 한다. 무슨 배짱인지 나는 딱 이 한 편만 보냈는데, 그게 덜컥 당선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