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역사소설의 새로운 경지

― 『남한산성』 김훈 작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는 작가의 말에는 이 작품의 생성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논다’는 것은 특정한 목적의식에서 해방된 몸과 마음으로 어떤 대상과 전면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장구한 세월을 자신의 몸속에 받아들이는 작가적 헌신이기도 하다. ‘허송세월’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러한 ‘놀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는 고백으로 읽힌다. 그래서 “나는 만날 놀았다”는 짧은 한 마디는 일말의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의 문장들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다. 그는 잡다한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배후에서 작용하는 힘들을 포착하면서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에 소설적 개성을 부여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당시의 통념을 지배하고 있는 이분법들이 깨어지거나 역설적으로 재구성되면서 새로운 느낌과 의미를 분출하고 있는 역동적 문체이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작가의 말)나 “불붙은 집 안에서는 대의와 방편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최명길의 말은 당대 사회의 이념을 떠받치고 있는 이분법이 제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문장들을 통해 작가는 온갖 통념들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들의 작용을 드러내면서, ‘남한산성’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당대 지배계층의 이념과 의식이 새롭게 주조되는 용광로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충격을 몰고 온 칸․용골대․정명수의 시각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조선 대신들의 말들에서 묻어나는 관념적 허위의식은 편린도 보이지 않는다. 칸은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전체적인 역학구도의 이면, 즉 의식의 층위에서 숨 가쁘게 전개되는 갈등은 조선의 대신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는 최명길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다른 축을 감당하고 있는 김상헌에게는 최명길이 생각하는 ‘삶’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김상헌에게도 역설적 사유의 역동성은 살아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그에게는 왕조사회의 이념이 단순한 관념이 아닌 것이다.

작가는 대립적 의미구도 속에 갇혀 있는 관념들을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치환한다. 그러나 이념과 무관한 삶 자체와 그 배경으로서의 세계에 대해서는 은유와 환유의 능숙한 구사를 통해 속도감을 유지하면서 실체적 무게감을 부여한다. 복잡한 서술이 필요한 상황들도 빼어난 은유를 통해 몇 개의 문장만으로 처리된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한 사람의 직업 전체를 동사들의 나열만으로 압축하기도 한다. “깎고 쪼고 뚫고 파고 훑고 후비고 깨고 베고 거두고 찧고 빻고 밀고 당기는 모든 연장들이 서날쇠의 대장간에서 나왔다.”

이처럼 폭넓은 언어적 자장이 ‘남한산성’을 당대의 이념들을 담금질하는 시공간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서날쇠의 대장간조차 단순한 기능성에서 벗어나 이러한 역사성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이렇게 김훈의 ‘놀이’는 과거의 맥박과 숨결이 느껴지는 역사소설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