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는 것은 소설론의 제1장이다.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많고 그런 사례가 허다하다. 내가 작가라면 그런 사례를 실감나게 소설로 적으리라. 그러지 못하므로 내가 보고 들은 얘기를 가감 없이 적으려 한다.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워서인데 독자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는지는 의문이다. 작가가 아니므로. 나, 거짓말을 못하므로.

퍼시발의 침묵
김 선생은 내가 다닌 시골 중학의 3년 선배이고 내가 중학 2학년이었을 때부터 줄곧 학교 교기(校旗) 기수였다. 요즘은 모르지만 그적에는 전교 행사나 행진이 있을 때 교기를 든 기수가 제일 앞장을 섰고 교기에 대해 일동 경례를 하는 게 관행이었다. 따라서 전교생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름보다 별명을 많이 부르던 시절이어서 김 선생은 퍼시발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퍼시발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공격했을 때 그쪽 영국군 사령관으로 있던 장군이다. 일본군의 야마시다 장군에게 무조건항복을 했고 항복 장면은 일제 말기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김 선생이 어떻게 해서 퍼시발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시골 중학에서 영어를 잘하기로 알려진 우등생이었고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 북』을 중학 상급반 때 떼었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또 외모가 얼마쯤 토착취향을 벗어나 있어 당시에 익숙했던 영국군 장군의 이름을 누가 갖다 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 선생은 중학 6년 선배이자 고교 때 스승이시다. 육이오 이듬해 우리 학년이 느닷없이 고등학교 2년생으로 편입되는 학제 변경이 있었다. 1951년 10월에 나는 복학을 했다. 그해 초부터 미 해병대 보급부대 소속 노동사무소에서 품팔이를 하게 되어 충북선 연변의 청주, 충주 달천을 거쳐 중앙선 연변의 동화(桐華)란 곳에서 천막생활을 했다. 학교는 초여름부터 일단 문을 열고 간이 수업을 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단 돈 몇 푼이라도 벌어야할 형편이라 그냥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9월 들어서부터는 복학하지 않으면 유급이라는 것이어서 10월 초에 복학을 한 것이다.
당시 학교 교사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어 변두리 교회와 동회 사무실을 빌려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된 후 한 달 만에 복학을 하고 보니 난감한 게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진도가 너무 나가있어서 백지상태로 출발하는 처지에서는 애로가 많았다. 당시 교사진이 과목별로 모두 충원된 상태가 아니어서 충원된 교사의 과목만을 가르쳤다. 역사, 국어. 지리, 과학 등은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런 판이라 새로 부임한 독일어 교사가 20대의 청년이었으니 거의 매일처럼 시간을 맡겨 진도가 과속상태였던 것이다.
이때의 젊은 독일어 교사가 정 선생이시다. 정 선생은 대학 독문과 재학 중이었고 따라서 각별한 열정으로 독일어 수업에 임하셨다. 당시 고교 독일어 교과서는 장하구란 저자의 것이 거의 유일본이었는데 어쨌건 정 선생 덕분에 졸업 전까지 두 권을 다 떼었다. (김기석 저의 독일어 교과서가 곧 나왔으나 그것은 대학용이었다. 그 두 째 권에는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비롯해 그 수준의 단편이나 에세이가 실려 있었다.)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내가 다닌 중학은 해방 당시 조선 13도를 통 털어 가장 작은 공립중학교로 교장도 한국인이었고 한미한 학교로 취급받았다. 학생 수도 적어서 누가 누구인지 대개 훤히 아는 처지였다. 그런데다 정 선생, 김 선생이 모두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고 모두 문과여서 자연이 잘 아는 처지였다. 또 이런 저런 사연으로 50년대 초부터 근자에 이르기까지 줄곧 평소에 비교적 자주 접하는 처지이다. 그런데 두 분을 안 지 30년이 훨씬 지난 뒤에 두 분만이 알고 나만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격은 아니었지만 적이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점심을 마친 후 한담을 하는 자리에서 정 선생이 육이오 때 경험을 털어 놓았다. 서울에 잔류해 있으면서 이리 저리 피해보았으나 결국 의용군으로 나가게 되었다. 8월말이었으니 그 때까지 용하게 배겨낸 것이다. 결국 변변한 훈련이랄 것도 없이 부대에 배속되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는 전진을 멈추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계룡산 근처까지 왔을 때는 완전히 패잔병이 되어 부대원도 다 흩어지고 세 사람이 남아 함께 행동했다. 패잔병의 패주는 고단하고 힘 드는 일이었다. 나중에는 끼니를 구걸하다시피 했다.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다. 정 선생은 동행인 인민군 두 사람에게 마침내 속내를 내 보였다.
“이제 전세는 기울었어요. 무한정 이렇게 북으로 후퇴해 보았자 활로는 생기지 않아요. 산을 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간 골병이 들 것이오. 끼니를 구걸해 보았자 주민이 신고하면 곧 잡힙니다. 그러니 산을 내려가 투항을 합시다. 아버지가 군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내가 책임지고 동무들의 안전을 보장하겠어요. 고향까지 가기만 하면 됩니다. 여태까지의 우의로 보아 나를 믿어 주시요. 우리 다같이 살 길을 찾읍시다.”
한 사람은 신의주 출신으로 해방 전엔 머슴살이를 한 처지로 그중 연장자였고 다른 이는 황해도 사람으로 무던한 성품이었다.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신의주 출신이 말문을 열었다.
“동무는 예가 고향이지 않소. 그러나 우리는 북이 고향이요. 죽으나 사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것 아니오? 동무의 마음은 알지만 아무 근거 없는 남쪽에서 어떻게 살겠소? 안 그렇소?”
그러면서 황해도를 바라보았다. 그도 고개를 끄떡이며 동조하였다. 그러자 신의주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냥 산을 타고 올라가 보겠으니 동무는 내려가시오. 겪어보니 몸도 약하고. 그래요. 당장 내려가시오.”
잘못 속내를 드러냈구나. 정 선생은 후회막급이었다.
“나 혼자만 살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산을 타고 어떻게 그 먼 길을 간단 말입니까? 그러지 말고 같이 갑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혼자 내려가라고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손을 내밀고 작별을 고했다.
“부디 조심해서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세요.”
야산을 내려오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래도 뒤에서 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달리면 더욱 위험을 자초하는 것일 터였다. 금방 총소리가 날 것 같고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날듯날듯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한참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손을 들어 흔드는 것이 아닌가. 아 살았구나! 정 선생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을 의심했던 것이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졌다.
야산에서 내려온 정 선생은 한길을 따라 가다가 충남과 충북 접경의 도로상에서 국군에게 잡혔다. 그리고 청주의 어느 극장에 수용되었는데 많은 포로들이 갇혀 있었다. 대부분 남쪽의 의용군 출신들 이었다. 수용된 후 얼마가 지나서 어느 날 군복차림의 청년이 극장엘 들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가만히 보니 중학 후배인 김 선생이 아닌가? 반가워할 새도 없이 김 선생 쪽에서도 알아보고 다가왔다. 수인사가 끝난 후 김 선생은 극장을 나갔다. 한참 후 김 선생은 미군 한사람과 함께 다시 나타나 정 선생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미군과 함께 책임자를 만나 얘기를 해서 수용소 극장을 벗어나게 했다. 민가에 가서 군복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수복된 고향으로 향했다. 집안엔 아무런 변고도 없었다. 정 선생은 탈출에서부터 석방에 이르기 까지 참 운이 좋았다며 김 선생이 아니었다면 잘해야 거제도 수용소쯤으로 흘러가서 어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35년 전의 일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 선생은 만나 뵐 때마다 김 선생 안부를 묻곤 했었다. 내가 더 자주 만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김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정 선생한테 들은 얘기를 했다. 당시 대학 신입생이던 김 선생은 종군하다가 미군부대 통역으로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청주에서 잠시 지체하게 되어 한동안 거주한 적이 있는 시내를 거닐었는데 극장에 인민군이 수용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저 호기심으로 가보았는데 뜻밖에 정 선생을 발견하고 미군과 함께 책임 장교에게 얘기해서 일이 잘 되었다는 게 김 선생의 간략한 설명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들을 뗄 수 있느냐는 말에 김 선생은 묵묵부답이었다. 타의로나마 의용군에 가담했다는 것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던 시절이니 기수 퍼시발은 35년 동안 완강히 침묵을 지킨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은 숨기지만 생색나는 일을 함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 그 친구, 내가 데리고 있었어. 사람이 그냥 무던해서 내가 많이 봐주었지”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정말 봐주기나 했을까? 술이나 등쳐먹은 게 아닐까?
일자이후 김 선생에 대한 경의가 더 두터워졌다. 여기 등장하는 정춘용 선생은 그 후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 생활을 했고. 김 선생은 영어영문학회 회장을 지낸 김용권 서강대 명예교수다.
서독 서커스단 내한 공연
서울에 사는 같은 과 동기생은 열명 정도다. 다 저 가끔 바쁘니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계제가 되면 2년에 한번 정도 모이곤 했는데 요즘은 뜸해져 버렸다. 그래도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동기생끼리는 오다가다 만나게 된다. 박 형은 졸업 후 유명 제약회사에 들어가 평생을 한 직장에서 근무한 삶의 모범생이다. 일시 귀국한 동기생을 위해 열린 모임 때면 근무 회사의 제품을 가뜩 넣은 쇼핑백을 하나씩 안겨주곤 했다. 그 박 형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토요일 점심 때 시간을 낼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자기가 점심을 사겠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궁금해서 이유를 물으니 별거 아니고 그 날 참석하면 알게 된다고만 하였다.
토요일 오후에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세 사람이 나와 있었다. 박 형, 교직에 있는 조 형, 그리고 역시 한 신문사에서만 40년을 보낸 신 형 등이었다. 모두 이유가 무어냐고 궁금해 했다. 박 형은 그저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어져 전화를 한 것이라면서도 굳이 이유를 대자면 옛날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들려준 얘기는 이러하다.
50년대 후반에 정혼하고 결혼을 했다. 약혼 직후 독일 서커스단의 내한 공연이 있었고 시청 광장에도 야단스러운 광고 플래카드가 걸렸고 온통 시중의 화제였다. 그는 약혼자와 서커스 구경을 하고 싶었고 막연하게 함께 가자는 약속도 전화로 했다. 그런데 막상 표를 구하려니 구해지지 않았다. 너무 늦게 매표를 시도했는지 매진되었다는 것이었다. 약혼자에게 서독 서커스 구경을 시켜주며 으쓱해 보려 했는데 난감하였다. 그래서 신문사에 근무하는 신 형에게 상의를 하였다. 신 형은 서독 서커스 공연을 주최한 신문사에서 근무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문사의 운신 폭이 컸던 시절이었다. 신 형은 이리저리 알아보고 결국은 관람권 두 장을 구입해서 박 형에게 우송해 주었다. 박 형은 약혼자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했고 빨리 비용을 갚아주고 한턱 쓸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결혼도 하고 정신없이 지나는 사이에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 결혼기념일이 되어 부인과 옛날 얘기를 하는 중에 서독 서커스 구경한 얘기가 나왔고 그러자 비용을 갚지도 한턱 쓰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겸사겸사 모이자는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쾌하게 웃었다. 신 형은 듣고 보니 관람권을 구한 것은 생각나는데 전후 사정이나 그런 것은 전혀 생가나지 않는다며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라고 덧 붙였다. 박 형으로서는 40여 년 전의 이행되지 않은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우리는 중증(重症)의 결벽증이라고 허허 웃었다.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곧이 듣겠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박 형은 의당 했어야 할 일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급할 때 아쉬운 소리하고 나 몰라라 한다면 도리가 아니다. 나도 이행하지 않은 약속이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공직자들이 박 형 심성의 몇 퍼센트라도 공유한다면 훨씬 깨끗하고 푸근한 사회가 될 것이다.
호떡과 분홍치마
염 군 과는 앞뒷집 사이였다. 담 하나로 격해 있었지만 대문이 서로 동떨어져 있어 우리 집에서 그의 집을 가려면 7~8분은 걸려야 했다. 취미가 다양했던 그는 낚시질도 하고 평행봉 운동도 열심히 하곤 했다. 고교 때는 전쟁을 다룬 단편을 써서 교내지에 실리기도 했다.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동호인을 만들려고 은근히 시 읽기를 권해보았지만 영 재미를 못 붙이는 눈치여서 그만 두었다. 육이오 때 그의 집에서도 약간의 풍파가 있어 가계가 전만 같지 못하였다. 고교를 졸업한 직후 그는 당시 금융조합이라고 알려져 있던 농협에 취직하여 수판을 놓았다. 그는 얘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오랜 만에 만나면 그 동안 겪었던 일이나 들은 얘기를 곧잘 털어놓곤 하였다. 아래에 적는 얘기는 그에게서 들은 경험담이다.
그의 첫 근무지는 제천이었다. 취직하고 나서 한달 쯤 되었을까, 숙직 당번이어서 숙직실에 있는데 중년의 선임 동료 한사람이 호떡 한 봉지를 들고 숙직실에 들렸다. 사실은 집에 영월에 사는 처형이 와서 묵게 돼 있어 둘이서 실컷 남편 흉들이나 보도록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호떡 봉지를 열어 먹기를 권하고 자기도 집어 먹었다. 숙직이란 책임이 따르는 것이어서 혼자 있는 것 보다 둘이 있으면 한결 든든하겠거니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든 후 얼마나 되었을까, 이상한 감촉이 느껴져 잠이 깨였다. 취침 전에 전등을 꺼서 캄캄하였고 시각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불쾌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자기 몸뚱이가 완전히 타인에게 장악되어 있음을 알았다. 꼼짝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이튿날 직장에서 남색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일을 보고 자기를 대하였다. 그는 격렬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느꼈으나 창피해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그저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 다음 숙직 당번이 돌아 왔을 때 사내가 다시 호떡 한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정색하고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당황한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지난번엔 미안했다며 이제 다시는 안 그러마고 얼버무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오늘은 원주 사는 처제가 왔어요? 돌아가지 않으면 경찰서에 신고하고 소문을 내겠다고 윽박질렀다. 사내는 호떡 봉지를 남겨놓고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그 후 직장이 영 찜찜해서 반년도 안 되어 자원해서 전근을 갔다.
한 해 정도 근무하다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는 공병대로 배속되었다. 군대 생활이란 게 다 고되게 마련이지만 공병대 생활은 특히 그러했다. 군대생활인지 근로동원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 바람에 밤잠만은 늘 늘어지게 잘 수 있었다. 어느 날 소대원 모두 곯아 떨어진 한밤중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이 부끄러운 데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자기 손을 잡아당겨 어딘가를 더듬게 하는 데 뭔가 이상하였다. 그것은 분명 사내의 몸이 아니었다. 자기가 잠이 깬 것을 확인하자 상대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기는 남녀 두 몸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로서 그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 아니 그녀의 유도에 따라 결국 그는 뜻하지 않은, 세상에서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정사를 치렀다.
이튿날 그는 한밤의 여인을 확인하였다. 약간 곱상하게 생긴 소대원이었고 그보다 선임인 위인이었다. 그 후 그는 두 몸 병정을 피하곤 했다. 징그러운 느낌이 들고는 하였다. 선임인 그가 앞서 제대하자 속이 후련하였다.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음에서도 사라져 기묘한 기억을 잊을 수 있었다. 몇 달 후 일요일에 여자가 면회를 왔다는 전갈을 받고 주보로 갔다. 면회 올 여자가 있을 리 없었다. 웬 분홍치마를 입은 여성이 앉아 있다가 성큼 다가왔다. “나 못 알아보겠어요?” 하며 배시시 웃는데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한밤의 여인인 두 몸 병정이 아닌가? 여자는 궁금도 하고 보고 싶어 왔다며 점심을 샀다. 그러나 여인의 분홍치마도 그의 마음을 당기지는 못했다. 그날 밤 근처의 하숙에서 유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잘라 돌아가라고 일렀다. 분홍치마는 자기의 진정을 몰라준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염 군은 입을 다물었다.
염재만 군은 나중에 서라벌예술대학에 가서 공부했고 『북간도』 집필 때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조사해 안수길 선생에게 공급하기도 했다. 나중에 『반노』라는 소설을 써서 피소되고 소설이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은 그의 특이한 성적 모험과 유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그가 세상을 뜬 지도 이제는 10년이 넘는다. 그의 빈소를 시종 지켰던 최고 동요시인이며 토박이말 보물섬의 주인인 작가 이문구도 얼마 안 있어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