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식의 「열하일기 만보」는 해체적 글쓰기를 통해 존재론적 사유와 문학성을 동시에 성취한 희곡이다. 그는 기지 가득한 이 우화에서 아르키메데스의 점인 말하는 짐승 미중(=연암)을 통하여 독자를 사회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의미심장한 성찰의 세계로 인도한다.
말(馬)로 변신한 연암(=미중)이 말(言)을 하기 시작한 것은 사방이 사막뿐인 ‘열하’의 어느 봄날에 콧잔등이 가려워 ‘생각’을 하면서부터이다. 생각은 많은 질문을 불러와 연암은 보름 동안이나 거식증과 불면증, 우울증을 앓다가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막 안에서 그는 ‘밖’의 기이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도(道)’가 아니라 물리적 힘, 즉 누가 기이한 것들을 더 많이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마을의 장로들은 연암이 동일성의 세계를 와해시킬 만큼 위험한 바깥 세계의 첩자라며 사형을 명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반대로 사형집행은 유보되는 대신 연암에게 함구령이 내려진다.
그러던 중 어사가 황제의 명을 받아 이 세상의 온갖 기이한 것을 찾아 모으기 위해 수레를 끌고 사막에 나타난다. 그는 사람들이 기이한 것을 내놓지 못할 경우 제국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라고 위협한다. 자신들의 고유한 동일성을 지키고자 밖의 기이한 것을 금지해온 마을사람들이 이제 그 위협 속에서 역설적으로 외부의 낯선 것을 찾아 나선다. 마땅히 기이한 것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말하는 짐승인 연암을 어사에게 바치기로 한다. 말을 해도 추방당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존재의 말살을 당할 처지에 놓인 짐승 연암이 마을사람들에게 제안한 생존전략은 각자 짐을 꾸려 어사가 눈뜨기 전에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지도에서 강제로 지워지기 전에 스스로 먼저 지워버리는 전략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저마다 가족이며 집을 구실 삼아 황량한 사막을 떠나지 못하고, 연암을 어사에게 넘기는 길을 택한다. 어사가 연암을 포박하라고 하자, 극중 사내인 거보가 “고통과 치욕 속에 빠져 있는 여자애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는” 이념 따위는 필요 없다며 연암의 목을 밧줄로 조른다. 바로 이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가장 어두운 힘인 노파 초매가 홀연히 등장하여 자신이 2,344년 동안의 긴 유배를 끝내고 돌아갈 새로운 황제임을 선포하고, 어사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그녀의 후계자가 될 창녀 만만과 더불어 사라진다. 뒤에 남겨진 연암은 새 이념을 설파해온 자신이 “허깨비일 뿐”이었음을 창대에게 고백한 후, 모래바람이 이는 벌판 너머로 말없이 어슬렁거리며 멀어진다. 연암이 사라지고나자 마을사람들은 그 날의 사단과 짐승을 곧 잊고 그들의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선조어록’을 낭독한다.
작가 배삼식은 이질성과 차이, 낯선 것을 금지하고 억압하는 동일성의 개체 혹은 집단의 정주(定住)이데올로기를 희화화한다. 이러한 희화(戱畵)는 연암이 삶의 새로운 길로 제안한 소위 ‘유목민적’ 존재방식을 마을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끝내 따르지 않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적 시선은 비단 가부장적 뿌리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우주에 향해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개인의 차이와 특성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국가적 통제장치의 폭력성에로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견고하게 지탱되어온 지난 세월을 종식시킬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초매로 대변되는 무정형의 혼돈(카오스)이다. 연암은 자신의 이념이 실제의 삶과 유리된 “허깨비”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사막 속으로 사라져간다. ‘열하’의 사람들이 기존의 일상적 삶을 이어가며 다시 동질적 집단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에서 역사허무주의가 묻어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이념’의 무망(無望)함 때문이다. 여기서 배삼식의 해체·구성적 글쓰기가 엿보인다. 역사소재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한 보편적이고 우주적 인식을 추상화해내어 이를 유려하고 정제된 문체로 형상화한 점은 근래에 보기 드문 큰 성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