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말하려고 하는 것과 말해진 것 사이의 거리
말하려고 하는 것과 말해진 것 사이의 거리에 대해 그는 자주 생각했다. 그는 이 세상의 영리한 수학자들이 달려들어야 할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가 말해진 것과 말하려고 했던 것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그런 입장을 갖게 된 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그건 원칙의 문제야, 라거나 일어날 일은 어떻게 하든 일어나게 되어 있어, 혹은 이런, 이러는 게 아닌데, 같은 말을 해놓고 그는 곧바로 자기가 정말로 하려고 했던 말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후회하곤 했다. 그러나 그 말 대신 정작 자기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단어들을 조합해서 여러 차례 발음해 보았지만, 도무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말하려고 하는 것은 왜 그대로 말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가 알고 있는 어휘가 부족해서이기도 하고, 언어가 본래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뻔한 이유 말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그는, 말하려고 하는 것이, 말하려고 하는 주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말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틴다는 식의 상상을 했다. 바꿔 말하자면, 주체는 말을 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말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혹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려고 한다고 할까. 그러고 보면 이것은 수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자들의 영역이기도 한 것 같다. 수학심리학, 혹은 심리수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훼손
절판된 지 오래인 첫 창작집의 개정판을 내자는 제안을 받은 소설가 유는, 출판사에서 보내져온 교정지를 읽고 열 편의 단편 가운데 세 편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세 편을 빼고 책을 내자고 했다. 출판사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했지만, 그냥은 도저히 부끄러워서 내지 못하겠다는 작가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가 부끄러워 한 것은 청춘을 대단한 훈장이라도 되는 양 치켜들고 있는 과장된 몸짓과 알맹이 없는 포즈였다. 그는 마흔 다섯 살이었다. 처음에 290페이지였던 그 작품집의 개정판은 216페이지로 줄어서 출판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책은 독자들의 반응이 아주 나쁘지 않아서 1년에 한두 번씩 책을 찍었다. 몇 년이 흐른 후 유는 그 작품집에서 스스로 두 편을 들어냈다. 이번에는 그 소설들이 반개혁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 사이 그는 혁명적 조세정책과 토지공개념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한 진보정당 지도자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책은 157페이지가 되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 작가는 다시 두 편을 추려냈다. 92페이지짜리 책을 창작집의 개정판이라고 내야 할 상황에 처한 출판사는 당황했고, 회의를 했고, 그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작가를 설득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작가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설득에 지친 편집자들 사이에서 이번에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왔다. 작가는 그 두 편이 무신론적이고 신성모독적 내용을 조금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1년 전에 그가 어떤 종교의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실소했다. 92페이지짜리 작품집은 그러나 6년밖에 가지 않았다. 출판사는 시중에 남아 있는 92페이지짜리 책을 모두 거둬들이고 절판시켰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저작권자인 소설가 유가 새로운 개정판에는 자기 소설을 한 편도 넣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에 대해 말한 게 없다는 것이 배제의 이유였다.
후일담이 하나 있다. 새로운 개정판에 자기 소설을 한 편도 넣지 말라는 유의 유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는 그가 개정판을 내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정판을 내 달라고 요청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자기 소설을 넣지 말라고 했지 개정판을 내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해석이었다. 출판사에서는 백지로 된 창작집 개정판을 낼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하마터면 독자들이 작품 없는 유의 작품집을 사 읽을 뻔했다는 이야기다.

읽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영향
소설가 와이는 자기가 쓰고 있는 것과 똑같은 소설을 전에 어디선가 읽어 보았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소설가이다. 괜찮은 발상이 떠올라 소설을 써나가다 보면 문득 누군가에 의해 이미 씌어진 소설을 똑같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글을 쓸 수 없다고 그는 하소연했다. 집필을 중단하고 곧바로 누구의 작품인지 추적하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는 것. 누군가 그에 앞서 먼저 쓴 게 분명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어떤 작품인지는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작가 이름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러면 그 작가의 모든 소설책을 샅샅이 뒤져 읽어야 했다. 대부분 그가 쓰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소설은 찾아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의혹이 사라지지 않으니 문제였다. 찾아내지 못했을 뿐, 어디엔가 틀림없이 그 소설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 의혹은 어느새 믿음이 되고, 그는 더 이상 소설을 이어 쓸 수 없었다.
사연은 한 잡지에 실린 그의 창작집에 대한 서평에서 비롯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자주 불려다니며 세 권의 책을 낸 비평가이기도 한 그 잡지의 편집위원이 쓴 글이었다. 그 글에는, 소설가 와이의 단편 소설 하나가 원로 작가인 제이씨의 단편과 너무 흡사하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이야기는 물론 인물과 배경까지도 많이 닮아서 놀랍다는 지적이었다. 비평가는 세대를 뛰어넘는 두 작가의 유사한 작품 세계를 비교하는 것이 흥미롭다는 식으로 글을 마쳤는데, 우회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두말할 것 없는 표절 의혹 제기라는 걸 와이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글에 거명된 제이씨의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와이는 억울했다. 읽지도 않은 소설을 베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읽기라도 했다면 무의식중에라도 혹시 어떤 부분이 끼어들 가능성이 있겠지만, 읽지도 않은 소설이 그럴 수는 없다고 그는 믿었다. 와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제이씨의 소설을 찾아 읽었다. 소설을 읽고 비평가의 오류를 신랄하게 지적할 작정이었던 그는 당혹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제이씨의 소설은, 자기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자기가 쓰는 소설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아예 똑 같았다. 읽지 않은 소설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난제였다. 그때 이후로 소설을 쓰거나 구상하는 중에 불쑥 심해에서 솟구쳐 올라온 파도와 번번이 맞닥뜨렸다. 파도는 그의 귀에 대고 외쳤다. 그거, 이미 있는 소설이야. 누군가 벌써 썼어. 지씨가 쓴 소설일 걸 아마.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 언젠가 읽었을 거야. 설령 안 읽었다고 해도, 어딘가 그것과 똑같은 소설이 있는 건 확실해. 공연히 헛고생하지 말라고. 한번 그 음성이 들리고 나면 계속 쓸 수가 없었다. 소설가는 글쓰기를 중단하고, 자기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그가 혹시 읽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씌어졌을 소설을 찾아다녔다.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다시 읽을 날이 올까? 장담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유는 이렇다. 만일 그가 쓰는 것과 똑같은 소설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씌어져 있다는 게 발견된다면 이미 씌어졌으니까 쓸 수 없고, 똑같은 소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없다. 이 세상에 있는 소설들을 모조리 읽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래저래 그는 소설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