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의 풍운아, 7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상징, 박정희와 맞선 강골의 저항시인, 한국 생명학의 창시자…. 김지하 시인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김지하의 문단 데뷔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의 시가 신춘문예류의 시와 체질상 맞지 않았기에 이런저런 신문과 잡지에 원고를 투고했을 리 만무하다. 김지하의 시 원고는 우연히 그의 하숙집에 놀러온 목포 친구 문학평론가 김현의 눈에 띄게 되었고, 김현이 막무가내로 데뷔의 길을 알아보겠다고 가져갔다.
김현은 김지하의 시가 신춘문예보다는 문예잡지의 신인 추천형식이 더 걸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어느 날 <창작과비평사>로 찾아가 천하의 백낙청에게 김지하의 작품을 신인투고작으로 처리해달라고 건네준다. 그런데 백낙청은 이게 과연 작품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긴가민가하다가 김수영 시인에게 신인으로 데뷔시켜도 좋을지 한번 봐달라고 심사를 의뢰한다. 그러나 천하의 김수영은 “인민군 노래 같다”라는 혹평과 함께 김지하 시를 ‘신인 불가’라고 퇴짜를 놓아 버렸다. 만약 김수영이 1970년대 초반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 데뷔 초부터 명망을 전국에 휘날리던 김지하에게 참으로 머쓱해 했을 일이요, 김지하의 문학적 미래를 예견하지 못했던 백낙청과 창비 역시 무척 아쉽고도 딱한 일이 된 것이다.
 

▲     © 운영자

 
그러나 김지하의 문학적 가능성을 일거에 알아본 탁월한 시적 득안(得眼)의 소유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인 조태일이다. 천하의 김지하도 조태일 시인을 언급할 때 “아, 조시인은 나의 왕초여!”라고 말할 정도다. 만약 조태일 시인이 김지하를 『시인』지에 발굴해내지 못했다면 자칫 김지하는 한국문단의 미아가 될 수도 있었을 거다. 당시의 한국문단 풍토에 김지하의 시는 그만큼 생소했고, 그 가락과 내용에서 이미 과거의 화법과 문체와는 판이하게 다른 형식으로 저만치서 홀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김지하는 한국문단의 총아 혹은 기린아가 되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담시 「오적」이 발표되고, 이어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과 북한의 노동신문에 그 시의 전문이 실리게 되자, 한 편의 시가 종이 위에 시퍼렇게 살아 숨쉬는 시적 핵폭탄이 되어 여론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국 시가 다름 아닌 김지하에 의해 부도덕한 권력과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김지하는 이후 반공법 위반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체포, 구속되더니, 수배와 잠행의 삶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낙인찍혀 무기징역을 선고받더니 이내 1여년 만에 석방된다. 석방되자마자 동아일보에 옥중기 「고행… 1974」를 발표하게 된다. 이 옥중기를 통해 문제의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을 폭로하게 된다. 이에 체면을 구긴 중앙정보부와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해버린다.
고문과 조작과 투옥의 가시밭길 속에서 김지하라는 이름은 박정희 군사독재와 대적하는 민족의 양심수였다. 이후 7여년의 수형생활 끝에 그는 5공 초기 우리 곁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민주투사가 아니었다. 시멘트 독방에서 피어난 가녀린 풀씨 한 포기를 통해 생명사상에 심취해버린 그였다. 1980년대 중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채광석 총무간사 시절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문학강연에서 그는 대중들에게 얼굴을 한번 보였고, 이즈음 ‘김지하현상’은 속출하여 그가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날개를 단 듯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는 문단 사람들과 친교는 거의 드물었고, 동학과 주역, 율려사상으로의 매진과 새로운 문화운동에 골몰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려 왔다.
그러다가 문단사람들과 재야 지식인들 사이에 김지하를 두고 한바탕 회오리가 휘몰아쳤으니, 그게 바로 1991년 5월의 일이었다. 민주화운동의 좌절감이 극단의 형태로 표출된 이른바 ‘분신정국’ 때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기명칼럼은 하루 아침에 김지하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전국적으로 회자되게 만들었다. 신문사가 독자들을 자극할 요량으로 이 기고문에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라는 선동적 제목을 붙인 탓에 재야 민주진영은 일제히 그를 독재에 아부한 회색분자로 매도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매일 죽어나가던 잇따른 분신정국이 김지하의 이 글로 인해 일시에 제압되고 말았다.
이 글의 파문은 대단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긴급 이사회를 열어 김지하에게 회원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언론은 김지하가 문인단체에서 제명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어 여기저기서 김지하 시인을 매도하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이 일로 인해 김지하는 한동안 정신적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진영과 민족문학의 대표 시인이 민주진영과 민족문학판에서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당한 까닭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비록 그의 그 글이 조선일보를 통해 나와 마치 운동권 전체를 매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유유한 생명사랑의 정신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그 우뢰성 같은 한마디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어 마땅할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것으로 인해 그 자신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의 상처는 곧 우리 문단의 협소한 시각과 갈등이 빚어낸 또 다른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199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집행부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범 문단 화해의 차원에서 김지하 시인을 다시 회원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이 부분에 또 다른 오해가 발생해 여전히 서먹서먹한 관계로 남아있게 된다.
이즈음 한국문인협회든 민족문학작가회의든 김지하라는 이름은 회원 명단에 누락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단독군장, 독립프로덕션의 문인이었다. 시대가 만든 이데올로기로 한때 영웅이었건만 이제 다시 시대가 만든 상황과 논리로 문학이라는 면류관, 시인이라는 관형사를 쓴 채 한 줄기 바람으로 저 홀로 나부끼고 있었다. 허나 여전히 문단의 한쪽 구석에서나마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후배 문인들이 그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현기영)와 이 단체의 자유실천위원회는 김지하 시인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조직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와 명분을 찾았으니, 그게 바로 지난 2001년 5월 4일 낮 1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있었던 ‘박정희기념관 반대 1인 거리시위’ 행사였다.
이날 김지하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 이후 37년 만에 거리의 시위현장에 그 얼굴을 내밀었다. 이날 시위현장에는 현기영 이사장과 김성동, 이시영, 강형철 등 문인 20여 명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시위에 나선 김지하 시인을 응원했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어 한 시간 동안의 시위가 끝나자 문인들은 김지하 작시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열창했다. 그러고는 인근 호프집으로 몰려가서 김지하 시인의 한국문단으로의 복귀를 뜨겁게 환영했다. 호프집에 모인 문인들은 김지하 시인 만세까지 외쳐 불렀고, 이를 지켜본 김지하 시인 역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거인이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