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그는 쿠션들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건물 전체가 커다란 보일러처럼 웅웅거렸기 때문이다. 그는 보일러의 불꽃들이 서로의 겨드랑이 틈으로 얼굴을 묻는 것을 상상했다. 쿠션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니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어쨌든 ‘사이'는 그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불꽃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소문을 들었는데 모든 것이 불길했다. 그가 오래 전부터 알아온 어린아이가 있는데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아인 혼혈이고 맞은 편 주택에 살았다. 할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좋아 늘 할아버지와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그는 아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을 귀엽게 여기기도 했고, 낮이면 텅 비어버리는 동네에선 딱히 그와 눈 맞음 놀이라도 할 사람이 그 아이뿐이라 꽤 관심을 두고 있던 터였다. 이런 저물녘에 웅웅거리던 건물에 불이 나기라도 한다면 그 안에 말라빠진 우엉줄기 같은 총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는 오늘 웬일인지 종일 엄마와 함께였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애 엄마는 누가 봐도 한눈에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계열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큼 머릿결이 고왔다. 동네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가 한국말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엄마와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몇 번 불러보고는 반응이 없자 “역시 못 듣는다는 말이 맞나보지”하고 서둘러 길을 내려갔다. 그녀는 그들이 자기 아이를 부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자기 나라 말을 몇 마디 뱉었는데 그 얼굴에 저녁 짓는 연기처럼 희뿌연 방글라데시의 영혼이 들렀다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 밥을 지으러 들어갔다. 아이는 세발자전거에 몸을 얹고 발을 땅바닥에 붙인 뒤 그 자리에서 앞으로 뒤로 자전거를 밀고 당기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이의 노래는 엉망이었지만 곧 그것이 그녀의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 엄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익숙하게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 있었다. 길을 잃은 나그네들을 위한 것처럼 한 음 한 음 길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노래였다. 귀머거리 아이가 어떻게 저 노랠 들을 수 있었을까. 아랫집 남자는 지독하게도 자동차 엔진을 끄지 않는다. 1층 주차장에서 그르렁 거리는 엔진 소리에 때문에 온 건물이 웅웅거린다. 그는 쿠션 틈에서 얼굴을 빼내어 드문드문 말이 끊긴 아이의 노래를 들었다. 그녀는 저 노랠 어떻게 가르친 것일까. 아이의 노랫소릴 들었는지 아이 엄마가 고무장갑을 낀 채 밖으로 나왔다. 아이가 자전거를 멈췄다. 묶으려다 만 앞치마가 그녀의 목에 간신히 걸려 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걸어가 대문을 닫고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아이는 엉거주춤하게 자전거에서 일어섰다. 둘은 얼마간 그렇게 마당에 서 있더니 곧 그녀가 앞치마의 끈을 등 뒤로 묶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 나라 말로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을 닫을 때 잘 되지 않는 발음으로 아이에게 외쳤다. “들어와.” 아이는 다시 자전거에 앉더니 그림자처럼 흔들거리며 대문을 바라봤다.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무서울까. 모든 것이 너무나 불길했다. 그는 오늘만큼은 이 건물이 불꽃에 휩싸여 마침내 거대한 보일러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시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자전거를 넘어뜨리고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래층 남자가 자동차의 엔진을 껐는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아이는 귀머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계속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일 수 있다. 그건 얼마나 불길한 일인지. 무서움을 참기 위해 계속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는 ‘사이'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불길한 노래를 들으며 계속 서늘한 틈새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바람은 언제나 넘치도록 가득 차 있어서 열어둔 창문을 넘어 계속 들어온다. 그는 얼굴은 그대로 둔 채 창문을 닫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