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평문학관은 안성시 금광면 581번지, 금광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시경재(詩境齋)라 이름했다. 시경루(詩境樓)라는 편액을 쓴 추사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풍광이야 느끼는 사람의 몫이어서 나는 시경재라는 옥호가 마음에 즐겁다.
세사를 물러나며 꿈꾸어 오던 작은 문학공간을 서둘러 마련했다. 문학관이라고는 하지만 작고 아담한 공간이어서 1백여 분, 시인들의 진필원고를 전시하고 1천여 권 가까운 시집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가끔 시인들이 찾아주고 영원한 문청들이 예고 없이 방문하기도 한다. 때로는 문학과 관계 없는 방문객도 있어 물속 같은 시경재를 깨우는 것이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는 김동옥 사진작가가 그렇다. 오늘 아침 문학관 문을 열고 있는데 검은 배낭을 메고 육중해 보이는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손에 든 젊은이가 주춤주춤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첫 방문객이어서 반갑게 맞았다. 문학관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길 옆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서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는 시인들의 진필원고가 게시되어 있는 전시실로 들었다. 배낭을 멘 채 시인들의 시를 읽어나가는 그를 보며 커피를 준비했다. 커피를 내자 그는 배낭을 벗어놓고 탁자 앞에 앉았다.
새벽 4시에 서울을 출발해서 금광호수에 닿았단다. 안성지방의 호수를, 그것도 호수가 피워 올리는 물안개를 카메라 렌즈에 담는 작업을 하는 중이란다. 일교차가 많은 요즘이 물안개를 담는 데 가장 적당한 시기여서 며칠째 안성의 호수를 찾아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성에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 호수마다 풍광이 다르고 느낌이 달라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또 다른 풍광이 된다며 그는 원두커피의 맛을 천천히 음미 했다.
 

▲ 미평 문학관   © 운영자

참 소탈하다는 느낌이 드는 젊은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할 때 시창작반에서 활동했다는 그는 내가 출강했던 대학 출신이어서 반가웠다. 그 무렵 군복무 하느라고 내 강의를 들을 기회는 갖지 못했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는 시인들의 진필원고를 몇 컷 렌즈에 담았다.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든다면서 시 몇 편을 더 읽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의 시선이 머물던 시편을 나는 다시 읽어간다. 시인들이 손수 쓴 원고여서 시인의 모습이 선하다.
최하림 시인의 진필원고는 화선지에 먹으로 쓴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이라는 시다. 붓글씨를 공부하지 않는 시인이 붓으로 자신의 시를 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한산(寒山)같은 시인도 / 길 위에서 비 오면 걸음을 멈추고 오던 / 길을 돌아본다 지난 시간들이 축축이 /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있다’는 시행을 따라가노라면 쓸쓸하고 초연한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영태 시인이 생전에 보내준 시편은 「아주 옛날에」다. 그의 독특한 스케치가 덧붙여진 진필원고는 세로로 쓰여 있다. ‘네가 없으니 / 춥다 / (소지품들을 봉투에 담는다) / 조막손이 쉬고 가던 / 유방도 담는다 / 어머니 보다 거기 / 따뜻한 품이 있었다 / 아주 예날에’는 부재하는 현존에 대한 고통스러운 정서의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사랑하던 여인은 지금도 시인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시 또한 아련하고 쓸쓸하다.
이성복 시인은 강원도 「정선」을 노래한 시편을 보내주었다. ‘내 영혼은 사북에서 졸고 /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 숨겨둔 외발가마에 내 영혼을 태워오너라 // 내 영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 깻묵 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오너라’라고 노래한다. 시인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아우라지 강가이다. 아우라지 강가에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되는 사북을 생각한다. 사북은 영혼이 졸거나 잠들 수 없는 역사의 땅이거니와 황지는 낙동강 1천3백 리의 발원지로 신라문화의 젖줄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땅이며 연못이다. 시인이란 무릇 이처럼 깨어 있는 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타이르는 듯 하다.
진필원고 한편 한편이 여간 소중하지 않다. 다시 읽을 때마다 감동이 다르다. 시인들의 진필원고는 시인인 나를 늘 깨어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