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인가 김정환 박사에게, 표지에 검은 나무 숲 사이로 진한 보라색 하늘이 암울하게 비치고 그 아래 처량히 고개 숙이고 무관심하게 배회하는 사람들의 황량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삽화가 그려진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김정환 박사가 그토록 오랜 시간 열정을 쏟아 번역한 제오르제 바코비아의 시들이 담겨진 시집이었다. 첫 시를 잠시 훑어보니 납으로 된 관들, 납으로 된 꽃들과 수의, 납골당, 시체 등의 독특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 왔다. 단지 암울하다는 느낌이 전해올 뿐 별다른 흥미를 주는 것 같지 않아 이 시집을 책장 한 구석에 꽃아 놓고는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나는 시를 읽고 그 속에 담긴 감성과 상징들을 제대로 느끼기엔 너무 메마른 사람이다. 평소 시를 즐겨 읽지 않는 나에게는 ‘납’이라는 제목의 첫 시부터 내 수준을 넘어서는 어려운 시로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이 시집의 서평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이 시집의 서평을 부탁받은 것은 단지 루마니아어 문학을 전공했다는 이유였던 것 같다. 어찌되었건, 자칫 그냥 잊힐 수도 있었을 시집 한 권을 정독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내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선 루마니아어로 쓴 바코비아의 시집과 김정환 박사가 한국어로 번역한 시집을 함께 꺼내 놓고 비교하면서 며칠 동안 천천히 읽어 보았다. 바코비아는 루마니아의 전통 작시법이 요구하는 강약약, 약강강 등의 운율과 각운의 규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또한 얽매이지도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작시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진부한 시적 단어들이 아닌 생소한 단어들을 시 속에 과감히 끌어 들이고 있었다. 이 시인의 시들은 독특하고 생소한 느낌의 시들이라 단순한 내용 번역조차도 쉽지 않아 보였는데 김정환 박사가 번역한 이 책의 시들은 그 느낌까지도 거의 다 살리려고 고심한 흔적이 엿 보였다. 이 책의 시들을 감상하며 가장 먼저 다가온 느낌은 바코비아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분위기를 자기만의 깊은 감정의 형상들로 거침없이 묘사하면서 그 분위기 속에 자신의 고뇌하는 내면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이 묘사해내고 있는 주변의 분위기는 죽음과 무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정신의 분열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코비아는 벽으로 막혀있는 갑갑한 대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푸름이 넘실대는 확 트인 전원도 아닌 이제 막 도시화가 진행되는 듯 보이는 소도시의 외곽 지역을 쓸쓸히 배회한다. 시인의 관념적 감각이 감지하는 그곳은 엄습하는 고독, 썩은 냄새를 풍기는 가을비, 납으로 만든 관이 있는 묘지, 피가 흐르는 도살장, 지치고 볼품없는 검은 나무들, 기분 나쁜 까마귀들, 더러움을 씻어 내지 못하는 무심한 흰 눈발, 그을음의 흔적들, 질척한 진흙, 노란 낙엽, 노란 석양 등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무겁고 음습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곳이다. 그곳은 물질문명에 조금씩 잠식당해 이내 생명의 활기를 잃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인간 군상들의 불길한 운명이 공연되는 작은 무대이며,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방탕한 부르주아나 노동절 뒤 생산에 내몰리는 프롤레타리아를 가리지 않고 ‘납’처럼 무거운 절망이 모두를 짓누르는 곳이다. 이 공간이 겪는 계절의 지나감 속에서는 모든 것이 암울하게만 비춰진다.
바코비아는 이 암울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암울함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 등은 얘기해 주지 않는다. 그의 시 속에는 예술적 이상이나 윤리적 이상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그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격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는 “모든 위대한 시인은 세계를 다시 만든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인들이 마치 창조의 첫날에 참여하듯이 세계를 다시 발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바코비아도 다른 위대한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바코비아의 시를 읽으며 그가 환각적 색채로 채색해 놓은 음습한 분위기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은 진부한 일상을 깨고 메말랐던 감성을 다시금 자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주리라 확신한다.
마침 김정환 박사가 바코비아의 시를 좀 더 깊이 음미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이 시집의 뒷부분에 바코비아의 시 세계에 대한 해석과 연보를 친절하게 첨부해 놓았다. 이 시집의 출간을 계기로 루마니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 바코비아의 시들이 가깝게 다가설 수 있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