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새로운 연대의 문학 위치 짓기

- 『비평극장의 유령들』 김영찬 작

문학이 사회변혁의 과제에 깊이 개입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도 의미 있는 실천이 되던 시기에, 비평은 뚜렷한 전망에 근거한 자기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지도비평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쓰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거대서사가 한꺼번에 비판대상이 되던 90년대를 맞으며 비평의 위세는 현저히 떨어졌다. 비평은 스스로 몸을 낮추거나 위축되어 작품을 위해 봉사하는 머슴이 된 것을 자축하였다. 언필칭 억압하는 교사의 가르침 대신에 작품의 음성이 들려오게 길을 열어주는 작은 목소리들, 그것이 비평이라 했다.

그러나 비평에는 지도의 기능이 있기 마련이다. 지도비평이란 표현에 덧칠된 교조주의의 색채를 지우고 나면 비평에 내재한 가르침과 그를 위한 비판과 분석의 힘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90년대 이후 젊은 평론의 대세는 비평의 ‘지도성’에 지레 겁먹은 것처럼 탈계몽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었다. 김영찬의 작업은 이 추세를 거스른다. 과거의 지도비평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는 비평 고유의 지도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큰 목소리로는 아니나 부드럽게 설득하듯이, 문학적 창조가 사회와 맺어진 맥락을 파헤치고 알림으로써 새 작품들의 갈래와 지형을 그려낸다는 것, 한마디로 문학의 윤리와 비평의 사회적 책무를 조용히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당대의 인식 지형도를 그리려는 김영찬의 작업은 2000년대의 문학이 90년대 문학과 변별되는 지점들을 식별하고 이에 대한 의미부여를 중심으로 한다. 90년대 문학이 탈정치와 내성을 앞세움으로써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상에 빠져버렸다면, 2000년대 문학은 여기서 벗어나 타자로서의 사회를 받아들이고 자아와 사회의 간극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에 더 열려 있음으로써 새로운 문학의 길을 연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90년대 비평의 세대론적 자기인식과 다른 점은, 그의 새 연대의 문학 위치 짓기가 과거처럼 신진작가를 옹호하기 위해 전 연대의 성과를 일괄 비판하거나 극복대상으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90년대 작가들의 변모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간직한대로 신진작가들의 작품 속에 흔적으로 새겨진 이 사회의 아포리아에 대한 (무)의식적인 진술을 통해서, 새 연대의 문학 좌표를 잡아나가고 창조성의 공간을 확대할 전망을 세우고자 한다.

물론 자본의 지배가 안팎의 전 영역에 확산된 시대에 문학의 전통적 기능을 복원하려는 기획은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신진작가들이 90년대의 상상적 주체의 폐쇄성을 넘어 타자에 접근하려는 시도와 이 후기 자본주의의 질서에 체념하고 순응 타협하려는 욕구 사이의 고통스런 긴장 속에 있으며, 그 긴장을 감당하는 가운데 새 연대의 문학이 비로소 이룩될 것이라는 그의 진단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으로 80, 90년대 문학에 대한 기존관념을 되풀이 한다거나, 그 둘의 통합으로서의 2000년대 문학을 설정하는 것이 손쉬운 도식이 될 위험도 안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연대에 대한 그의 입론이 나르시시즘적인 상상적 주체가 타자의 수용과 함께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라캉의 정식에 의존한다는 혐의와도 별개의 것이 아닌 듯 보인다.

그가 주된 전략으로 삼는 징후읽기도 그 나름대로의 미덕과 한계를 다 가지고 있다. 문학 속에는 타자로서의 사회의 진상이 흔적을 통해, 혹은 결여를 통해서 징후적으로 드러나기에 징후읽기는 작품과 사회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식의 읽기는 기본적으로 사회학적인 것이며, 작품성에 대한 평가와 결합된 창조의 측면을 통합해내는 것이 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김영찬의 작업의 강점은 작품에 대한 면밀하고 섬세한 분석에 뒷받침되어서 문학의 사회적인 연관성을 환기하는 데서 나아가, 작품읽기의 순간들을 통해 작가적 고투와 탐구와 반성의 깊이를 가늠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비평이 단순한 징후읽기의 차원을 넘어서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계몽을 포기하지 않되, 성찰하고 반성하고 되짚어보고 의미를 이룩하는 힘, 그것이 신진답지 않은 그의 비평의 새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