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내가 사는 곳은 북한산국립공원 아래 정릉골이다. 이곳에 살기 시작한지 두 해를 막 지나고 있다. 북한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여러 군데지만 집 뒤편으로 난 길은, 아파트의 후문을 끼고 오르는 칼바위능선 길과 청수장 쪽으로 오르는 영추사 길 두 곳이다. 영추사를 거쳐 대남문 쪽으로 오르는 길은 버스종점을 지나 등산용품과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와 식당들이 들어서 있어 등산객들이 많은 곳이고, 칼바위능선 길은 산길이 시작되는 입구에 약수터가 있어 물을 뜨러 가는 어르신들이나 길을 아는 마을사람들이 주로 가는 비교적 한적한 길이다. 나는 거의 이쪽 길을 다녔는데 칼바위능선은 고사하고 등산로의 입구까지도 겨우 다녀오는 산책이 대부분이었지만 이곳을 청수목공소길이라 이름 붙었다.
청수목공소, 이 소박한 70년대 풍의 간판을 처음 본 건 이사를 온 며칠 후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느라 아파트 뒤쪽의 산길로 발길을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길을 잡아끄는 목공소의 조용한 앉음새며 자그마한 문, 그리고 바깥에 내 놓은 통나무 몇 개, 그 옆은 경로당이었다. 청수경로당 옆 청수목공소, 흰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단정하게 쓴 오래된 간판 글씨는 어딘지 ‘역전 다방'이나 동네 정미소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겼다. 바로 그날 저 목공소에서 책장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산책을 나설 때마다 청수목공소 앞을 지나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수목공소는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혹시 문을 영 닫은 것은 아닌가 싶어 지날 때마다 자세히 눈 여겨 보았으나 그 사정을 바깥의 풍경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다. 책장을 짜야 하는데, 집에서 가장 가깝고 마음에 드는 간판을 내건 청수목공소는 내내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산책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청수목공소의 문이 버젓이 하루 종일 열려있는 날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봄이 왔다. 대팻밥이 드문드문 널려있는 청수목공소의 문 앞에 노란 고들빼기가 피어있었다. 세상에, 문 앞에 꽃을 피우다니. 저 문은 늦은 가을부터 겨울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문 옆으로 쌓여있는 통나무 몇 개와 낡은 나무사다리도 여전했다. 청수목공소에서 책장을 맞추는 일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닫힌 문들은 사람을 그 앞으로 끌어들이고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닫힌 문은 은폐된 벽이다. 문과 벽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 문은 언제든지 벽이 되어버릴 수 있다. 문은 창보다 크지만 폐쇄적이고 그 입은 때로 너무나 완강하게 다물어져 있다.
어느 날 청수목공소의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얼핏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에서 나무를 다듬는 기계소리만 들려왔다. 아, 문을 닫은 목공소가 아니었구나. 언젠가는 여기서 책장을 만들리라 다시 결심했다. 열려 있는 목공소의 문을 본 것은 이렇게 단 한 번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산책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늦은 봄이 왔고 산길로 나섰다. 청수목공소는 ‘청수 인테리어'로 말끔하게 바뀌어 있었다. 허름한 문이며 다른 것은 여전한데 간판만 바뀌었다. 내가 책장을 맞추려 한 곳은 청수인테리어가 아닌 청수목공소였건만….
그렇게 청수목공소는 내게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가, 은폐된 벽이었다가, 입구를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였다가 내게서 아주 사라졌다. 형광빛 주홍색의 ‘청수인테리어'는 더 이상 내게 닫혀있음으로 말할 수 없는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신비한 ‘문'이 아닌 것이다. 이제 그 닫힌 문 앞에서 애타지 않는다. 더 이상 그 문이 열려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문에 대한 화두를 붙잡고 늘어지게 해주었던 청수목공소의 그 ‘문'은 아직도 내겐 닫혀있다. 내겐 아직도 그 문을 열어야하는 지난한 과제가 앞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