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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와 세 번째 아내 마틸데가 살고 있는 이슬라 네그라의 저택은 해변과 접해 있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대문 앞에서 통역자가 내게, 여기에서는 네루다를 ‘대지의 마도로스’라 부른다고 일러주었다. 바닷가를 향한 테라스로부터 좁다란 복도를 통해서 들어가는 바에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자리가 항상 마련되어 있었다. 인터뷰는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커피를 두 모금 째 마시고 있을 때 그가 들어 왔는데, 책에서 늘 보아오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집이 단단하고, 혈색이 올리브 빛깔이라는 점, 우뚝한 코와, 커다란 갈색 눈을 덮은 눈꺼풀이 정겨움을 유발한다는 점이 대면으로 얻은 새로운 정보였다.
나는 낯선 사람이나 나이 든 어른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져서 말문을 잘 열지 못했다. 일부러 <일 포스티노>의 한국판 포스터로 표지를 싼 책을 들고 있었는데, 이내 그의 빙그레한 웃음이 그것을 간파한 사실을 전해주었다. 사람을 순식간에 흡입하는 저 마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너무나 익숙한 관계처럼 서로 꽤 긴 틈을 두고 침묵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둠에 잠기듯 가만히 젖어들기만 하는 내게 굵고 나직한 그의 음성이 들려올 때마다 파도소리가 배경으로 깔리고는 했다.
⊙ 네루다 _ <일 포스티노>는 나를 그린 게 아니라 우편배달부를 그린 영화 아닌가요?
⊙ 김형수 _ 하지만 그(우편배달부)의 일거수일투족 안에 선생님이 앉아 계시잖습니까.
어느 틈엔지 네루다 선생님이 묻고 내가 답하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 네루다 _ 지금 준비하는 행사가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이라고 했나요? 아, 코리아! 가고 싶은 나라이지요. 언젠가 코리아 작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전쟁 직후였을 텐데….
⊙ 김형수 _ 이태준입니다. 1951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북경반점에서 좌담을 함께 했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 네루다 _ 그런가요? 전후 건설기의 코리아 이야기를 꽤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은 나는데, 내용이 다 부서져버렸어요, 저 파도 위의 거품들처럼.
⊙ 김형수 _ 이태준 선생은 당시의 기행문에서, 네루다 선생님이 “미국 자본가들 밑에서 피땀을 착취당하는 칠레의 광산노동자들 속에서 시를 써왔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벌써 미국이 앞으로 파쇼의 길을 걸을 것을 예견하여 미국청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많은 시를 썼으며, 좌담회가 있은 다음날 중국어판 시집에 자기의 이름을 한문으로 그림 그리듯이 써서 보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네루다 _ 그랬을 거예요. 중국에서 번역된 시집이 있어서 소련의 예렌부르그 등 좌담에 참석한 모두에게 선물하느라 그 낯선 언어로 된 이름자들을 아주 낑낑대며 그렸던 기억이 나요. 그때 내가 그림을 제법 잘 그려주었을 걸. 하하.
⊙ 김형수 _ 이태준 선생님이, 그간 유럽이 세계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남미에서 온 네루다라는 시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지상에 전혀 다른, 유럽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세계가 있더라는 소감을 남겼는데, 그것이 제가 오늘 선생님을 뵈러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 네루다 _ 내 인상이 괜찮았던가 보오. 그 양반은 그 후 어떻게 살았습니까?
⊙ 김형수 _ 죄송하게도, 저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고, 그 분은 노스 코리아의 작가입니다.
⊙ 네루다 _ 아하~.
네루다의 입에서 튀어나온 탄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감탄사가 내가 하려는 말을 잘라 버렸다. 나는 대화를 잠시 중단했다가 머쓱해지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 김형수 _ 소년시절에 체코 시인 ‘얀 네루다’를 좋아하여 성을 바꾸었다고 들었습니다.
⊙ 네루다 _ 한국에서는 외국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습니까?
⊙ 김형수 _ 선생님에 대해서는 많이 읽습니다. 제게 선생님의 시집이 세 권 있는데, 하나는 1971년에 박봉우라는 시인이 번역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20년 후에 김남주라는 시인이 번역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정현종이라는 시인이 번역한 것입니다. 세 분 다 학자가 아니라 한국 시의 영토를 넓힌, 대단한 시인들입니다.
⊙ 네루다 _ 뜻밖이군요. 우리 남미의 작가들에게 사우스 코리아는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쪽은 제국주의와 친하고 또 한쪽은 비동맹국가 아닙니까?
⊙ 김형수 _ 그에 따라 문학에서도 한쪽은 상업주의 과잉에 들떠 있고 한쪽은 정치주의 과잉에 시달리는 분열적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1억 명의 사용자를 가진 언어권에서 기백 년, 기천 년의 문학사를 끌고 온 주류들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 네루다 _ 젊은 선생(나를 이렇게 불렀다)이 볼 때 이 네루다의 시는 정치주의 과잉에 속하는가요 상업주의 과잉에 속하는가요?
⊙ 김형수 _ 과잉이란 그 반대쪽에 결여를 남기는 것 아닙니까. 선생님의 시는 과잉이나 결여를 극복한 모델로 꼽아야 한다고 봅니다.
⊙ 네루다 _ 듣기 싫은 말은 아니오. 나는 시가 생명체이기를 원해 왔어요. 내가 소년이었을 때는 시가 어렸고, 내가 젊었을 때는 시도 청년이었으며, 내가 고통을 받던 무렵에는 시도 좌절을, 또 내가 사회투쟁에 뛰어들었을 때는 시도 투쟁적이었으니까.
그랬다. 네루다는 문학을 천상(天上)의 놀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1969년 9월 30일, 칠레 공산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불행과 난관을 수십 년 동안 지켜보았으며, 국민의 모든 슬픔과 기쁨에 같이 참여했던 칠레인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방인이 아니고, 나는 그들로부터 왔으며, 나는 백성의 한 부분입니다”라고 했던 말을 세계의 지식인들은 그의 문학관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이었다(참고로, 당시 좌익이 분열을 일으켰기 때문에 네루다는 4개월에 걸친 열띤 유세를 행한 다음에 ‘민중의 단결’을 추구하는 다른 입후보자를 밀어주기 위해 물러났다).
⊙ 김형수 _ 실례지만 만일 선생님께서 칠레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셨다면 글을 계속 쓰셨을까요? 한국의 시인들은 결코 시와 정치 사이에서 갈등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 네루다 _ 우리들은 시인이 중국의 마오쩌뚱,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정치지도자이기도 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세네갈의 대통령을 지낸 레오폴드 셍고르도 위대한 시인이었고, 라틴아메리카의 문단에 널리 알려진 작가 로물로 갈레고스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지냈지요. 초현실주의 시인 에메 세제르는 마르티니크에 있는 포르 드 프랑스의 시장을 지냈고요.
⊙ 김형수 _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문학과 작가의 현실참여에 대한 논란이 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것은 낡은 의제로 이해됩니다
⊙ 네루다 _ 낡은 의제라…. 글쎄요. 나는 그런 규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봐요. 나는 이 집안에서 노상 벌어지는 일들과, 내 가정과, 정치와, 자연 속에 나 자신을 그냥 놓아두는 것을 좋아하니까. 나는 영원히 왔다 갔다 돌아다니는 인간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건 간에 나는 그곳에서 그곳의 노래를 부르겠지요.
⊙ 김형수 _ 우리 세대는 그런 자연스러움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마오쩌뚱, 호치민도 시를 썼고, 셍고르, 세제르도 정치를 했지만 그들에게서는 문학을 프로파간다로 전락시키는 일도, 또 예술적 순수를 내세워 시를 체제에 동화시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지금 우리들의 시대를 파괴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 네루다 _ 젊은 선생은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비관적이군요. 그런 감수성이 좋아 보입니다. 비극을 인지하는 능력이 없으면 행복을 꿈꾸는 능력도 부족하기 마련일 테니까.
⊙ 김형수 _ 선생님은 혹시 요즘 등장하는 시인들의 작품도 읽으십니까?
⊙ 네루다 _ 잎 다 지고 앙상히 가지만 남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시오. 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너무나 아득하게 멀리 떨어지고, 고원지대가 너무나 춥고, 너무나 버림받은 나의 나라 칠레를 언제나 안고 사는 사람, 그 영원한 칠레 사람의 하나로서 늘 칠레의 시와 노래를 끼고 살지요.
⊙ 김형수 _ 칠레의 요즘 시인들도 「마추비추 산정」 같은 시를 쓰는 지 궁금합니다. 자아와 세계를 달팽이와 달팽이 껍질에 비유한다면 한국의 시인들은 이제 더 이상 부서진 달팽이 껍질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대지는 사라지고 상황만 무성한 노래를 부르느라 목이 쉬어 있는 셈이지요.
⊙ 네루다 _ 젊은 선생은 무엇이 그런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보나요?
⊙ 김형수 _ 작품들이 삶의 형식이나 운명의 형식을 떠나서 지식과 정보의 조합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인터넷이 시에게 문명을 안겨주고 자연을 빼앗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네루다 _ 에이레의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인간이란 사고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을 가능한 두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시는 손으로 써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겠지요.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타자기를 만나면서 시와의 친밀감을 잃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건 소설과 어울리고, 인터넷은 영화와 어울리는 거 같죠?
⊙ 김형수 _ 이번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은 문명의 ‘어스름한 지대’를 사는 영적(靈的) 존재들을 결집하려는 행사들입니다. 이를 축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네루다 _ 오, 동의, 동의!
한참을 유쾌하게 웃으신 후 네루다 선생님은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의 축하 영상물을 촬영하느라 갖은 포즈를 취해주셨다. 그리고는 손수 축하 메시지를 써서 내게 주었다.
이제 나는 알겠다. 내가 단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여러 번, 어떻게 재생해야 할지는
생각지도 않고, 죽었다는 것을,
흡사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다른
생애를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처럼.
그리고 여기에 나는, 어째서 내가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가를.
어째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서 있다.
흡사 여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
그런 망각의 한복판에 내가 혼자 살고 있는 것처럼,
맨 끝까지 살아남은 한 마리의 새처럼―
아니, 그와 반대로, 도시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 P.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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