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행여 근대라는 것이 하나의 의식장치로 고착된다면 나는 그런 근대는 가차 없이 사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왜 근대에만 갇혀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곳에서 출발한다.

나는 고대의 승려시인 월명이 피리를 불어 그 피리소리로 하여금 밤하늘의 달의 운행을 멈추게 했던 시를 통해서 고대인이 된다. 내가 이백의 시를 읽을 때 그 고대의 이백이 근대의 내 심금 속에 와서 살아있다. 근대는 근대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완결적이지 않다. 근대가 아무리 나의 동시대의 사유공간일지라도 나는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한다. 분명한 것은 이 근대 속에서 살아온 내가 근대 이전의 모든 시대들의 통시적(通時的)인 낯선 과거로부터 반추되어야 할 나 자신의 전신(前身)을 찾아내는 것을 삶의 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나는 근대 이후의 미래와의 예정조화(豫定調和)도 가능한 한 선험 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미 있었던 고대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전방위적인 존재의 자유만이 자유라는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따라서 고고학적 기억과 상상이 만나는 접점으로서의 현재는 현재 이상이다. 한 티끌이 온 세계를 아우른다는 것은 한 찰나가 온 시간을 내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가장 뒤떨어진 시대가 현재이다’라는 역설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대한 격의 없는 성찰이 있어야겠다.

‘근대와 나, 근대문학으로서의 나’라는 이런 명제가 일단 ‘근대의 나’라는 대범한 이름으로 집약되기를 바란다. 그간 근대에 대한 인식도식(認識圖式)의 여러 발언들이 쏟아낸 근대 의미론에 대해 역겨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짧은 20세기’인 근대가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길고 긴 지겨운 20세기였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어떤 사람에게는 근대는 이미 조종(弔鐘)을 울린 것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또한 근대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허구이거나 그것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연동작용도 없는 외부로서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여러 층위의 근대를 내가 살고 있다는 종합적 실감과 함께 나의 태생으로서의 우연이 어느덧 필연으로 될 때 느끼는 당혹감도 뿌리칠 수 없다. 역사의 종언이란 기껏 역사주의의 종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러한 근대에의 이의 제기에 얼마쯤 부합될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선사시대에 빚지고 있다. 심지어는 일련의 석기시대 선사를 역사의식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역사의 광의(廣義)를 받아들일 때 왜 근대만 있는가, 왜 근대사만 역사이고 현실이겠는가라고 묻게 된다. 근대란 근세, 중세 그리고 고대의 아득한 후예로서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중심주의는 커다란 지적 오류이다. 근대가 근대 이전의 자식이라면 그것은 또한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시대들의 태생지일 것이다. 1백년 뒤의 당대가 지금의 근대를 얼마나 상대화할 것인가를 상정한다면 근대는 한갓 어느 역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나의 근대는 그러므로 내가 근대인인 것과 동시에 전근대인이고 후근대인이라는 복합적 근대의식이 의식의 외연(外延)으로 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미 시작된 근대 속에서 태어났다. 고대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에서나 중세 몽골 복속(服屬) 1백 년이나 그 밖의 1천 번 이상의 침략을 견디어내며 하나의 언어로 생존해온 삶을 과거로 삼고 식민지 시대로서의 객체로 그 언어를 잃을 뻔한 고통의 연대기 속에서 나라는 한 개체의 운명도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근대가 반유교적인 깃발 아래 일어난 5.4운동으로부터라는 언설이 있다. 그 운동에 상당한 자기동일성을 공급한 한국의 3.1운동 역시 유교 부재의 근대적 자아가 표출된 역사운동이었다. 바로 봉건체제의 억제된 규범들이 힘을 잃은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두 지역의 근대는 거의 동시적이다.

이는 아시아에서의 근대 자생론(自生論) 내지 내재론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미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은 송학(宋學)에 대한 실학(實學)을 선각적으로 향유하기 시작할 때 봉건잔재로서의 전통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각 지역의 자아발견이 함께 진행되었다. 한국의 금강산 그림들은 그 이전의 동양화라는 보편적이거나 중화주의적인 산수화 세계로부터 서슴지 않고 풀려난 자아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실경(實景)이란 바로 이 자아를 실현하는 자아 대상화이기도 하다. 아직도 당송(唐宋)의 시풍을 전범으로 삼고 있는 양반사회의 문학행위가 여전히 그 유전적(遺傳的)인 권위를 내걸고 있었지만 그것의 해체징후는 강력한 것이었다. 16세기 한글소설이 나온 사실은 고대 시가 이래의 한국어 문학이 단절되지 않은 하나의 실증이 된다. 아니 그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가 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타파하는 이상적인 자아실현일 때 그것은 이미 근대의 발생을 반영한다. 이와 함께 시 역시 이두(李杜)의 복제를 거부한 허균이 자신의 창조라는 시의 의의를 표방할 때 역시 거기에서 근대 자유시의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17세기 양반시조 파괴의 사설(辭說)과 판소리 그리고 18세기 패관문학(稗官文學)과 박지원을 이은 정약용에 이르는 ‘조선시(朝鮮詩)’의 시대가 열렸다.

근대 문학의 이 같은 환경은 어떤 출발점으로 설정하기 보다는, 이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될 때 서구 외세와 식민지의 충격을 이겨내는 정치적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근대 문학의 계몽주의는 그것이 밖으로부터의 계몽주의를 수용할 경우에도 전근대 속에서의 근대 진행의 의식에 친연(親緣)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온갖 근대론들을 다 벗어난 거기에 서 있는 내 동시대가 근대의 원점이라면 그것은 내가 고향을 공간개념이 아니라 시간개념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일 것이다. 근대로서의 고향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오랜 전통사회를 만들어온 농경사회가 담지(擔持)하는 불변의 향토성은 어느덧 지워지고 있다. 이미 고대에도 고향이란 떠난 자가 다시 돌아갈 때 낯선 곳으로 확인되는 비애의 장소로 술회되었다. 하물며 근대 산업사회의 도시화가 몰고 온 삶의 방식에서는 인간 각자가 불가불 고향상실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근대 한국시의 한 실례로 정지용이 읊은 바 지난날의 고향에 대한 회상은 고대 성당(盛唐) 시인의 고향이탈의 애수와 별반 다른 것이 아니지만, 근대 사회란 전통사회의 원풍경(原風景)을 제도적으로 유린한 행위로 가능한 것이다. 공장과 집단거주지,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모든 개발은 20세기 철학에서의 단독적 존재의식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러므로 전통적 선린(善隣)이나 태어난 곳의 애착을 낳은 고향은 어쩌면 한 생물종(生物種)의 멸종에 해당할 수 있다.

나의 근대는 이러한 고향 부재의 공간을 자명한 것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식민지로서의 고향은 학대와 약탈, 소외의 대상이었고 전쟁으로서의 고향은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든 잃어버리는 현실이었다. 오랜 혈연성과 천부적인 우애들을 실현하는 농업 공동체의 미덕이 더 이상 남겨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의 질곡은 분단시대의 적대적 상잔(相殘)과 현대문명의 경쟁 상황에서 한층 더 엄혹할 수밖에 없다. 근대는 인간이 기나긴 생활사를 통해서 다져놓은 곡선들을 지워버리고 직선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다그쳤다. 바로 이 공간으로서의 고향상실을 모면하는 일은 시로서의 고향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고향은 이미 내가 태어나거나 자라난 현장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시간 속에 남겨져 있다는 것, 그 시간 속의 기억들이야말로 바로 나의 모태감(母胎感)이나 동정감(童貞感)으로 오래오래 소멸되지 않는 설화적인 과거를 보존하고 있다. 여기서 한 보기를 들겠다. 유난히도 근대와 근대성 그리고 근대문학으로의 한국을 탐험해온 한 평론가는 그가 왜 소설가가 되지 않고 평론가가 되었는가를 인상 깊게 밝혀주고 있다.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아이가 처음 만난 양지바른 길가의 제비꽃의 쪽빛에 대해서 좀 더 자라난 뒤 항구도시에 가서 처음으로 만난 확 트인 바다의 쪽빛이 그 아이의 성장기적 원상(原像)이 되었다. 아이는 장차 문학의 길에 들어섰을 때 미(美)의 목적론적 정지 상태에서 역사성으로서의 지평선과 응축으로서의 시를 동시에 해석하기에 이른다. 아득히 펼쳐나간 바다의 쪽빛과 한 점으로 응축된 제비꽃의 병치(竝置)로 하여금 아이는 식민시대 말기와 전쟁의 외상(外傷)에 대한 상상적 치유인 소설쓰기보다 역사적 근거에 의존하는 치유로서의 바탕에 투사한 것이다. 근대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이런 개별 체험들이 명멸하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연대기에 공헌해왔다.

그러므로 근대의 고향은 시간에 결부될 수밖에 없다. 기억과 기억으로서의 상상이란 바로 이 시간의 의미와 동떨어지지 않는다. 설령 근대가 자생성과 내재성으로부터 작동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지속은 밖으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힘의 논리와 두절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봉건시대를 견디어 온 자아가 사대주의의 보편주의에 얼마나 구조적으로 부정되었는가, 얼마나 억압받았는가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실제 상황을 밝혀준다.

세계의 육지 5분의 4를 자신들의 영토로 경영했던 서구문명이 주도한 근대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다. 근대화란 이러한 서구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탄식은 당연하다. 바로 이 같은 근대로서의 서구를 이식하는 일이 근대사회의 모든 역학을 추동해왔다. 그럼에도 근대란 결코 일목요연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 타당성이나 복합성 그리고 각 지역의 생활상의 여러 상이성(相異性)들에 대해서 근대의 의미는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요컨대 근대에는 해답이 주어질 수 없는 문제군(問題群)일지 모른다.

우선 사회체제가 자본주의체제인 것을 전제하기로 한다. 거기에 민주화야말로 근대화의 기본지표라는 사실이 1차 명분으로 수긍되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주의건 자유주의건 마르크스주의이건 두루 포함시켜야 할 정치적 단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의 또 다른 의미는 이른바 아시아적 정체성(停滯性)을 탈각한 경제성장과 공업화 문제도 실질적으로 천착할 때 드러날 것이다. 어떤 경우는 근대를 일정한 역사적이거나 구체적인 사태를 지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근대성―합리성’의 사유도 있다. 그래서 근대가 하나의 정당한 의미를 가질 경우 먼저 오랜 봉건적 전근대적인 굴레를 벗어버린 자아찾기와 직면한다. 이것이 서구 르네상스시대를 통해서 근대의 첫 특징을 발견하고 시민사회시대로 그것의 완성을 보는 도식(圖式)과 일치된다.

가령 그것은 반세기 이래의 서구 자본주의와 한국이나 중국 등지의 동아시아에서의 자율적 근대의 여러 징후와도 시차(時差)가 큰 것이 아니다. 다만 서구 근대과학의 놀라운 발전의 가속(加速)이 과시한 도시문명의 탄생이나 화폐경제의 신장(伸長), 상공업 팽창과 시민 및 농민의 사회적 각성과 기독교 개신교와 계몽사상, 정치의 활성화를 가져온 선거제도의 확립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가 궁극적으로 근대의 척도가 되고 있다.

한국 역시 17세기 이래의 자발적 실학으로 싹튼 근대가 19세기 개항(開港)에 이르는 동안 왕의 백성이 천부(天賦)의 인민으로 깨어나는 사실은 바로 그 자아의 발견과 함께 타자의 발견이 동행하는 명제로 되었다. 만반 준비가 끝난 근대의 전사(前史)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각성의 자발적인 과정은 기대할만한 가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식민지체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로서의 근대로 치달았다.

나는 이런 시대의 변경에서 봉건교육의 골방에서 근대교육의 교실로 옮겨졌다. 한자 교육이 중단된 상태에서 식민지 지배언어로 교육받는 한 아이가 된 것이다. 내가 배우는 문자는 그때까지 있어온 조선어 수업이 없어진 일본어였다. 그 일본어를 ‘국어’라고 불러야 했다. 이런 시기임에도 나는 마을의 머슴으로부터 한글을 배움으로써 이 집 저 집 굴러다니는 한글 소설 따위를 호젓이 읽을 수 있었다. 1945년 식민지시대가 끝났을 때 나는 유일하게 한글을 읽는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의 최초의 국어교과서에서 이육사의 시 「광야」를 읽은 것이 내 운명에 문학의 씨를 뿌린 것으로 되었다. 나는 이 시로써 ‘광야’라는 무한한 공간을, ‘천고(千古)’라는 무기한적인 시간을, 그리고 ‘백마를 탄 초인(超人)’이라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대면한 것이다. 바로 이 사실에서 내가 근대에 갇혀있을 수 없는 시간 공간 인간 그 이상의 생태(生態)에 지향하는 가능성을 터득했는지 모른다.

1960년 4월 혁명이 근대적 자아의 폭발이라면 그것은 이미 1910년대 말의 3.1운동, 아니 그 이전 봉건말기의 갑오농민전쟁과 각종 민중봉기 역시 근대인간의 동기부여적인 선례(先例)들이다. 그러나 4월 혁명은 1년 뒤의 군사쿠데타 체제에 의해 정치를 상실한 대신 경제가 주도하는 근대화과정을 통해서 그 시대적 명분은 무단적(武斷的)으로 유보되었다. 바로 이런 사회현실 위에 나의 근대문학은 우연히 놓여있게 되었다.

여기서 근대의 의미는 우선적으로 한자시대가 끝난 뒤의 한글시대를 총칭하는 일로부터 근대의식을 내세울 때 가능할지 모른다. 한국의 근대화가 서구화 내지 공업화로만 규정될 때의 자기 정체성(正體性)이 실종되는 상황과 성장 개발 그리고 기술의 발달만으로 규정할 때의 그 물화(物化)의 비극을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문화를 ‘제2경제’로 표방하기까지 했다.

이런 경우 한국어로서의 한글로 말하기와 쓰기는 근대로서의 자기실현을 표상한다. 근대의 본래 명제가 반봉건에 있지만 그 시대의 지배언어인 한자가 아닌 근대의 개인에 합당한 민중언어인 한글을 향수(享受)함으로써 그것은 봉건의 극복에 이를 것이다.

1950년대 전쟁 이후의 전통계승론과 전통단절론이 논쟁적인 고민으로 나타났다. 그 계승과 단절의 통합적 지향이 근대 개념의 대승적(大乘的) 시각에도 기여할 때 거기에 한국어로서의 고대시가나 중세가요 그리고 근세의 성리학체제에도 불구하고 민중과 여성을 통한 생활시가(生活詩歌)들이 이어짐으로써 그것이 근대의 서술주체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시는 20세기 벽두의 언문일치 이래의 한문혼용 한글로 시작해서 70년대 민중주의적 한글전용의 문학에 이르러서야, 한자가 문학유산의 전거로 되고 나서야, 비로소 한글의 삶이 온전할 수 있다. 이 한글전용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근대의 시간으로 명명된다. 바로 그것이 움직이는 근대이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서로 소통하며 동시에 서로 복사(複寫)되지 않는 근대일 것이다.

근대가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한 삶의 질 문제나 생산력 확대 및 공업화의 진도(進度)로 만 이론화되지 않는 전체로서의 역사발전단계로 인식될 때마다 거기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근대로서의 언어문제인 것이다. 근대언어란 언어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자아실현을 반영할 때의 의미이다. 그것은 단순한 전근대적 언어행위의 극복만이 아니라 자아가 실재하는 언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범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전후 폐허위에 남겨진 언어의 파편들을 습득함으로써 어린시절의 고향언어로부터 떠났다. 이것은 내가 언어의 고아였다는 사실을 말하는지 모른다. 동시에 나는 짓눌린 언어의 상속자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에 의한 자유를 누리는 폐허의 사생아였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내전으로서는 남과 북의 동족상잔이었고 외전으로는 세계 16개국과 두개 이상의 사회주의 국가의 참전으로 이루어진 세계대전의 규모였다. 그런데 3년간 5백만 명이 죽어간 이 전쟁의 광기와 야만은 살아남은 자의 폐허 위에 잃어버린 언어 대신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까지의 명사(名詞)들도 개념어들도 달라졌다.

한국 근대어는 식민지시대 기간 내내 다져진 근대문학 이전의 어투와 그 이후의 어투가 공존한 것이 거의 종료되다시피 한 50년대 이후의 언어에 대한 서술적 단계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오늘날 유려한 자기 표현력을 구사하는 근대로서의 언어는 15세기 창제된 한글이라는 문자언어가 새의 울음소리나 어떤 짐승의 소리도 다 표기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긍지와도 솔선적으로 만나고 있다.

나는 이런 언어를 학습보다 생존으로 하여금 익혀왔다. 한두 번의 임시국어사전을 외우는 일도 내 언어생활에서는 예외였다. 그러므로 나는 언어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생존의 여러 고비를 넘기는 동안 하나의 언어형식을 불규칙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내 문학생활 50년은 분단시대의 중요한 시기의 축도(縮圖)이기도 하지만 한국근대문학 1백년에 걸친 언어의 변천에 임의로 동행하는 시간의 연정선상이기도 하다. 나의 이전 시대는 1910년대의 2인 시대, 1920년대 동인지시대,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비정상적 순수주의와 저항적 현실주의 문학의 명멸로 진행되었다. 그것이 1950년대 전쟁시대의 종군문학과 1960년대 이래의 분단시대 문학을 영위하는 토양을 이루었다.

휴전선 이북에서는 점차 이남의 언어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이질화가 고착되었고 그 같은 이북의 체제언어나 이남의 규범언어는 오랜 자국민 언어를 현저히 종속화 시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나의 언어는 이런 상황에서 표준어 중심부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본능을 낳았으며 내 기억 속의 자연언어가 때때로 무력화되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요컨대 전근대적 주술언어(呪術言語)와 근대적 의식언어 사이에서 내 언어의 자장(磁場)은 가까스로 만들어졌다.

이런 언어 행로는 70년대 이래의 실천적 언어의 극적인 체험을 지나서 다시 한 번 존재가 언어에 속하지 않거나 언어가 존재에 속하지 않는 상호해방을 위한 존재언어 내지 언어존재의 경지를 꿈꾸게 되었다. 언어는 언어다, 라는 것과 언어는 언어 이상이다, 라는 것의 반추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마침 이 시기의 내 시 세계를 화엄의 세계라고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 화엄이란 바로 이것과 저것의 관계적 행위이다. 그것은 모든 현실을 우주적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우주의 한 사투리가 될 수 있다.

누가 나를 근대인이라고 말한다면 굳이 항의할 까닭은 없다. 근대로서의 나와 근대문학으로서의 내 문학이란 근대의 어떤 바깥에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신의 매혹도 그것의 발생환경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신은 자신의 시대라는 한계를 넘어설 보편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아니 시대 역시 다른 시대와의 타자적 접속에 의해서 명기(銘記)될 것이다.

왜 근대는 아직도 더 할 말이 많은 것처럼 근대론의 인구를 증가시키는가. 그것은 근대라는 행위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역사의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아시아판의 청산과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반근대적인 존재양식의 범죄인 바 근대의 완성을 정체시키는 주요모순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근대지식인의 관념적 근대논리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과장하거나 지연시키고 있는 빌미가 되고 있다.

나는 이 같은 근대에 반동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근대인간의 고민을 더 이상 허비하고 싶지 않다. 이제까지 거대명제였던 근대를 미시화(微示化)함으로써 근대론의 과체중을 덜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명제성이 극도로 배제된 문학의 내면주의도 액면대로 승인할 이유가 없다. 특히 문학을 시장주의적, 문화권력주의적인 상관물로 만들고 있는 근대적 굴절현상은 참을 수 없는 악덕이기까지 하다.

근대의 가치인 자아에 대한 성찰 없이 근대인으로서의 나는 무의미하다. 다만 나는 근대를, 근대는 악이다, 근대화는 암세포의 번식이다, 라고 성토하는 어떤 심층생태학의 담론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근대의 성찰적 재근대화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적어도 표의문자와 한자문학이 표음문자와 한글문학, 문어체가 구어체로 바뀐 이래 구어와 문어의 경계가 소멸돼 문학, 교사의 문학이 친구의 문학, 전통의 문학이 개신(改新)의 문학, 주변부 문학이 세계문학으로 전환하는 일을 근대 후기의 놀라운 당위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근대문학은 서구문학 내지 서구문학 수용이라는 일방적인 수동행위를 타파하는 일과도 동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이제까지의 이데올로기적인 강제를 털어버림으로써 완료될 것이다. 나는 고고학적이고 미래학적인 기억으로서의 상상과 상상으로서의 기억이 함께 내 근대문제가 버티고 있던 자리에서 화해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여러 생을 살고 있는 나는 하나의 근대를 궁극적으로 비근대화하고 말 것이다.

근대야, 너는 더 이상 군림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는 묘지가 아니라 자궁이기를 염원하라. 이제 나는 너의 혈족(血族)이 아니라 너의 타자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