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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밭단상_ 첫번째 - 억새꽃 사라진 정동진역

글 | 김영남_시인. 1957년생
시집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밤의 여로』 등

 
시인들이 모이는 술좌석에 합석하면 나는 가끔 나의 시 등단작과 관련하여 곤혹스런 질문을 받곤 한다. 내용인즉 김영남 씨는 정동진을 가보지 않고 시 「정동진역」을 썼다는데 그게 사실이냐는 것이다. 시 「정동진역」은 나의 1997년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신춘문예 준비 당시 난 이미 잡지로 등단한 상태였고,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을 하다가 IMF 상황 도래로 집까지 완전히 날려버린 상태에 있었다.

그 무렵 실의에 빠져있는 내게 잡지의 등단작을 기억하고 있던 N 시인이 찾아왔다. 오자마자 내게 ‘왜 그 아까운 재능을 썩히고 있느냐’며 빨리 다시 도를 닦으라(시를 쓰라)는 거였다. 이유인즉 나는 절대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이고, 시를 쓰면 금세 빛을 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이마에 쓰여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다분히 감성적이고 헤픈 내 씀씀이에 맞는 지적이기도 한 것 같고, 또한 너무나도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그래,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야, 지금 내 나이 40세이지만 박완서 선생님도 40세에 등단해 저렇게 성공했다. 이제부터 노력해 연말 신춘문예로 인생을 한번 바꿔보는 거야’하고 작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삼사 개월 동안 정말 닥치는 대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쓴 시를 모아보니 30여 편이 되었다. 당시 나는 신춘문예를 투고해본 경험이 없어 그 방면에 조예가 깊은 한 여류 시인에게 투고작을 한번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중복 투고 제한 신문사를 빼고 나니 4개 신문사에 투고가 가능했다. 4개 신문사에 5편씩 묶어 당선 소감까지 써 놓고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연말 회사일, 각종 망년회 등에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12월 21일. 모 신문사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전갈이 왔다. 와! 걸렸구나 하는 확신과 함께 어떤 작품이 당선되었을까가 몹시 궁금했다. 확인해 보니 그게 바로 「정동진역」이라는 시였다. 아니, 「정동진역」이 당선되다니……
 

나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투고할 때 넣을까말까를 가장 오랫동안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작품이었고, 골라놓고 나서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검토를 부탁했던 여류 시인과 함께 일부를 수정한 작품이고, 더군다나 지역 안내용으로 소개한 어느 잡지사의 정동진역 사진을 책상 앞에 오려붙여 놓고 한번 쳐다본 다음 냅다 30분 만에 쓴 시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힘들이지 않고 술술 썼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깐 이런 점들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즉, 다른 시에서 보지 못한 자유스럽고 개성적인 묘사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정동진역을 가 본 적이 없어 시 속 풍경과 실제 풍경이 어떻게 같은지, 다른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여,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이 시 창작배경의 정보에 대한 무장이 시급해 직접 답사를 하기로 하였다. 가서 확인해 보니까 시속의 풍경과 실제 풍경이 너무나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매우 운치 있는 시적 풍경이었다. 와, 이런 멋진 장소를 내가 시로 등기할 수 있다니. 나는 안도의 수준을 넘어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득의양양했다. 왜냐하면 정동진에 갑자기 관광붐이 조성되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또 거기를 갔다 온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 시비가 섰다는 등 여러 가지 우호적인 사실들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2년 후 나는 자랑 겸 확인 겸 몇몇 시인들을 대동하고 술을 멋지게 산다는 명분을 내세워 재답사를 하기로 했다. 가서 본즉 입이 쩍 벌어졌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 아름답던 ‘억새꽃’ 어우러진 철길과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여먹던 라면집’들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시멘트 바닥의 철로변, 유흥가를 방불케 하는 음식점과 모텔들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의 시비가 서 있었다. 자랑의 현장이 낭패의 현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억새꽃 어우러진 해안가 간이역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주 평범한 간이역 풍경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난 그 무렵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개발행정의 즉흥성과 무자비한 폭력성을. 해안가 간이역을 간이역답게 만들고 정동진역을 정동진역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저토록 풍경을 망가뜨리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산꼭대기에 배가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고 무자비한 자연파괴 현장과 정동진의 망한 모습을 저토록 실감나게 표현했나 하고 주변 사람들도 입을 모았을까.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었다고 무자비하게 망가뜨린 정동진역. 그 아름답던 억새꽃 철로변 풍경이 이제 나의 시 속에만 유일하게 남게 되었으니 나는 정동진역을 가보지 않고 시를 썼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