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얼굴
내년에 탄생 100주년을 ... | 김일주
문학과미술의만남
젊은 그들 - 내가 걷는 ... | 이성부
주인공의 여로를 따라서
블룸을 따라 더블린을 걷 ... | 나희덕
대산초대석
“소설 쓰는 게 갈수록 ... | 함정임
대작 에세이
휘트먼의 시 : 사람, 자 ... | 서정인
시론
한국문학사 스토리텔링을 ... | 박덕규
대산칼럼
걸어온 20년, 걸어갈 20 ... | 곽효환
기획특집
대산문화재단 창립 20주 ... | 김종길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 | 최일남
성숙하고 품위있는 문학 ... | 김병익
한국문학을 위한 큰 축복 ... | 유재천
우리 문학의 대 사건 ... | 황동규
청렴, 무사, 공공성 ... | 김광규
대산문화재단 20년! 대를 ... | 유안진
‘문학꿈나무 기르기’와 ... | 오정희
문화국가의 이상 ... | 최원식
아름다운 청년, 대산문화 ... | 정호승
한국 집필가와 독서인의 ... | 이윤택
대산문화재단은 우리나라 ... | 김진경
세계의 귀중한 작가를 만 ... | 최인석
풍족하게 밥을 먹여주는 ... | 최재천
‘바보 재단’ ... | 김광일
벌과 나비의 어울림 같은 ... | 송찬호
세계의 문호와 지성들이 ... | 최미경
한국문단의 별장, 광화문 ... | 김수이
나를 있게한 계성원 청소 ... | 김지훈
새로운 이정표, 대산대학 ... | 윤고은
가상인터뷰
“여전히 ‘중립의 초례 ... | 강형철
나의 삶, 나의 문학
무등산 안고 돌기 ... | 문순태
나의 아버지
저 꽃도 새도, 그리고 당 ... | 반칠환
광화문글판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 ... | 전성우
나의사진첩
심양에서 열린 한중 시인 ... | 오탁번
조선동서유기
저들이 내게 유람을 권한 ... | 구지현
근대예술의 풍경
[멍텅구리], 경성 시내를 ... | 박선영
詩샘
詩 샘 - 황홀한 유폐 외 ... | 신경림
단편소설
델마와 루이스 ... | 김인숙
침묵의 미래 ... | 김애란
글밭단상
첫번째 - 억새꽃 사라진 ... | 김영남
두번째 - 눈의 전화 ... | 강신애
세번째 - 젊은 작가여 , ... | 김도언
네번째 - 나쁜 짓 , 해보 ... | 김경민
생각하는 동화
머나먼 현재에서 날아온 ... | 이명랑
대산문학상
중진 문인의 생명력과 한 ... | 전성우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
시부문 - 자기 응시의 미 ... | 정과리
소설 부문- 체류와 표류 ... | 권오룡
평론 부문 - 언어 너머를 ... | 서경석
번역 부문- 전쟁의 소용 ... | 송상기
문학현장
모옌의 문학세계와 중국 ... | 박재우
개성이 없다면 공통성도 ... | 모옌
우리문학의 순간들
김지하의 「오적」과 ‘ ... | 최재봉
이 계절의 문학
문학과 정치, 쏟아지는 ... | 하현옥
원작 대 영화
욕망과 사랑의 경계는 어 ... | 이대현
우리시대의 화제작
억압적 사회의 알레고리 ... | 전철희
내 글쓰기의 선생
목 잘린 부처, 없는 길을 ... | 이원
창작 후기
다시, 몰아 읽는 일기 ... | 박성준
나의데뷔작
두 번의 등단, 두 번의 ... | 송재학
TV와 나의 근대
시골 출신 매체 변천사 ... | 최시한
명작순례
이슬람 신앙의 순애보(純 ... | 이윤재
번역후기
다정하고도 낯선 한국 여 ... | 김현자
번역서 리뷰
남북통일의 필요성을 중 ... | 손지봉
새로 나온 책
N.E.W BOOKS ... | 운영자
재단 소식
대학생동북아대장정 동북 ... | 운영자
대작 에세이_ 휘트먼의 시 : 사람, 자연, 신

글 | 서정인_소설가,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36년생
소설 『강』 『가위』 『달궁』 『붕어』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용병대장』 『모구실』 『빗점』 『개나리 울타리』 등

편집자 주 ㅣ 이번 호부터 1962년 문단에 데뷔한 이후 소설집 『강』 『가위』 『토요일과 금요일 사이』 등과 장편소설 『달궁』(전3권), 『봄꽃 가을 열매』 등을 상자하며 삶의 다양한 풍경들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표현해온 소설가 서정인 선생의 에세이를 4회 연재한다.
 
 
 
월트 휘트먼이 위대한 혁명적 시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위대한 사상가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그에 앞서 여러 사람들이 그보다 더 치열하게, 명확하게, 체계적으로 생각했고 주장했다. 패링턴에 의하면, 이미 그 200년 전에 진보적 청교도였던 토머스 후커는 국가의 계약 이론과 인민 주권주의와 공공봉사로서의 국가 개념을 주장했고, 민주적 우상 파괴자였던 로저 윌리엄스는 인간의 형제적 관계를 강조하고, 권력 신수설 대신에 계약설을 내세워 상호동의를 국가조직의 전제로 생각했다.

18세기에는 중농주의자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권이 재산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호전적 이상주의자였던 새뮤얼 애덤스는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주장하고, 폭정을 하는 것은 항상 소수이지 민중이 아니라고 믿었다. 미국 독립전쟁 발발 2년 전에 프랭클린의 소개편지 한 장을 가지고 필라델피아에 상륙한 톰 페인은 거의 선동에 가까운 극렬한 어조로 영국 왕정의 비리를 파헤치고 식민지 사람들에게 독립선언할 것을 촉구했다. 재산권을 옹호하는 자본주의 연방주의와 결별한 토머스 제퍼슨은 사람의 정직함이 부의 축적에 따라 증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민주주의의 해악에 대한 치료법은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믿었다.

왜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주장했는가? 그것은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휘트먼은 민주주의가 실현된 미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 그의 시대의 미국의 형편을 혁명적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남북전쟁 후 산업을 근대화하고, 부를 쌓아올리기 위해 자본주들은 관료들과 야합하여 대통령까지 타락시켰다. 이런 시대를 두고 마크 트웨인은 워너와의 공저 『도금된 시대』를 썼고, 페링턴은 ‘불고기 파티(바비큐) 시대’라고 불렀다. 이런 형편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1620년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한 순례 조상들이 신대륙에 민주주의를 곧 실현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아마 사실과 정반대이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 민주주의는 ‘히드라의 머리를 한 괴물, 방탕하고, 무종교적이고, 무정부의 씨앗’이라고 생각되었고, 급진주의자들조차도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들이라고 공언하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조지 워싱턴은 민주주의자들을 프랑스의 폭민주의의 추종자들이라고 싫어했다.

그렇다고 개국 아버지들이 뉴잉글랜드에 종교의 자유를 실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영국 교회의 강요를 캘빈주의의 강요로 바꾸었을 뿐이다. ‘종교적 열병과 헤브루적 신학과 귀족적 편견’이 17세기의 미국을 지배했다. 존 코튼은 ‘인민이 지배자가 된다면, 누가 지배를 받을 것인가?’라고 묻고, 그와 그의 소수 독재자들은 그들 자신이 박해자들로 변신했다. 존 윈드롭은 성서에 민주주의의 근거가 없고, 이스라엘에 그와 같은 정부가 없었다고 주장하여, 민주주의가 가장 지속성이 없고, 사고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하버드 총장이었던 인크리스 매서는 보수주의자들의 우두머리로 대표적인 신정주의자였고, 그의 아들 코튼 매서는 그를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등대로서 하느님이 손수 불을 붙인 성스러운 횃불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벌써 그들 때에도 시대착오였다. 이것은 캘빈주의의 위대한 옹호자인 조너던 에드워즈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18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세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제퍼슨의 중농주의에 맞선 자본주의의 알렉산더 해밀턴은 패링턴에 의하면, 한 조각의 이상주의도 없이, 18세기의 진보주의의 주류인 개인주의와 국가권력의 축소 사상, 둘 다를 거절하고, 모든 사람은 악한으로 가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이라니, 인민은 거대한 짐승이다’고 그가 말했다.

해밀턴과 제퍼슨의 중간쯤 되는 입장을 취했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젊었을 때는 프랑스적인 인간 권리 쪽이었지만, 늙어서는 영국적인 재산 권리 쪽이었고, 캘빈주의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의 본성은 믿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람들은 필요를 통해서만 선량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적 세력과 재산의 권리를 앞세우는 보수적 세력이 한편으로는 양심과 진리를, 다른 편으로는 힘과 영광을 각각 추구하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속되었고, 그것들이 때로는 서로 갈등하고, 때로는 서로 견제 보완하면서 오늘의 미국을 이루고 있다면, 시인은 운명적으로 딴 모든 나라에서처럼 언제나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휘트먼은 혁명적이었다.

그가 혁명적 시인이었다는 말은 우선 그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생각을 가진 시인이었다는 뜻과, 그러한 생각을 파격적으로 표현한 시인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민주적 생각은 그의 시집 『풀잎들』 전편에 걸쳐 흩어져 있다. 그 생각은 대체로 민주주의, 자유, 평등, 남녀동등, 보통사람들, 노예문제에 대한 그의 신념들로 나타난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에 바탕을 둔 휘트먼의 민주적 생각에서 그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미국의 많은 공문서에 표어처럼 따라다니는 ‘인종, 색깔, 국적, 성, 나이,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고용하고 승진시키고 대우’하겠다는 차별철폐 선언은 단 한 걸음도 앞선 바가 없다. 그러나 그를 그가 가진 민주주의 사상만으로 위대한 시인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에 앞선 필립 프리노나, 조얼 바르로나, 휴 브랙큰리지 같은 시인들보다 별로 더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의 위대함은 그의 생각이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생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데에까지 미쳤다는 점과, 그러한 그의 생각을 파격적으로, 또는 혁명적으로 실현, 즉 형상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민주적 생각은 그의 동료애, 나아가서 그의 인류애에 이르러서는 벌써 그가 단순한 제도적 민주주의 이상의 것을 주장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의 사해동포주의와 개인주의는 인간에 대한 그의 깊은 신뢰와 애정에서 화해된다.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은 더러 그의 상반된 생각들을 아우른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도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확장주의도 화해된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광산, 다코타의 숲, 미주리의 강, 나이아가라 폭포, 네브래스카, 캐나다, 위스콘신, 아이오와, 미네소타, 플로리다의 푸른 반도, 루이지애나의 값을 매길 수 없는 델타, 앨러배마와 텍사스의 목화밭, 뉴멕시코의 은빛 산악들, 쿠바 등에 이르기까지 독립 80년 만에 ‘광대하고 당당한 삼십팔주(그리고 앞으로 더 생길 많은 주들)’의 삼백오십만 평방 마일로 확장된 것을 자랑스럽게 노래했지만, 그의 확장주의는 그에 앞선 연방주의자들이나 그의 뒤를 이은 제국주의자들의 확장주의와는 다르다.

그는 「민주적 전망」이라는 산문에서 미국의 영토적 공간적 확대에 상응하는 새로운 국민문학, 또는 민족문학의 필요성과 그 시기의 임박을 절실하게 주장했고,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유럽의 문화유산과 과감하게 결별할 것을 역설했지만, 그리고 그의 이러한 생각이 햄린 가랜드 같은 사람의 지방문화주의로 고스란히 계속되었지만, 그의 국민문학론은 민족주의나 미국주의로보다는 인습을 항상 파괴해야 하는 문학의 숙명과 역사의 진보를 확인하는 사실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가랜드의 지방문학주의도 문학의 지역성이 아니라 현장성의 강조였고, 그가 주창한 진실주의는 그 나름의 민주적 사실주의의 한 변종이었다.

휘트먼의 미국주의는 그것과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세계주의와 화해를 하고, 민족주의가 빠지기 쉬운 배타성, 침략성을 정화한다. 그의 인간에 대한 애착은 그 당시 그에게 알려진 세계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에까지 연장된다. 유럽 각국을 포함해서, 나이제르, 콩고, 시리아에서부터 수마트라, 보르네오, 캄보디아에 이르기까지, 알프스 산, 피레네 산에서 안데스 산, 마다가스카르 산, 히말라야 산에 이르기까지, 멕시코 바다, 브라질 바다, 페루 바다에서 힌두스탄 바다, 중국 바다, 일본 바다에 이르기까지, 론 강, 도나우 강, 볼가 강, 아마존 강에서 황하, 양자강, 갠지스 강에 이르기까지, 지브롤터, 다르다넬스에서 나가사키 만, 멕시코 만에 이르기까지, 아랍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사람, 멕시코의 당나귀꾼, 기독교의 사제에서 코사크, 유태인, 중국인, 일본인에 이르기까지.

휘트먼의 인간사랑은 동료사랑, 인류사랑과 같은 애착과 더불어 부부사랑과 같은 애정을 포함한다. 그의 사랑은 따라서 추상적이고 정신적임과 동시에 구체적이고 육체적이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는 남녀 간의 사랑과 그 사랑의 즐거움은 물론 사랑의 행위 자체와 그 기관을 오늘날 생각으로도 지나칠 정도로 과감하게 노래한다. 그는 ‘갇혀서 아픈 강물들,’ ‘남근,’ ‘근육의 욕구와 섞음,’ ‘신비스런 광란, 사랑의 광기, 온전히 내맡기기’를, 그리고 ‘밀물에 찔린 썰물과 썰물에 찔린 밀물, 부어오르고 감미롭게 아픈 사랑의 살점,’ ‘안과 밖으로 동그란 허리, 허리통, 허리의 힘, 남자의 공들, 남자의 뿌리,’ ‘자궁, 젖꼭지, 젖끝, 젖 우유,’ ‘허리의 아름다움, 거기서 엉덩이의 아름다움으로, 아래로 내려가서 무릎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는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금기를 파괴하는 그의 혁명적 정신의 일부이고, 특히 캘빈주의적 인간 억압을 거절하고 꾸밈과 감춤 없이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려는 그의 노력이다. 그는 성을 죄악시하지 않고, ‘건강한 구원과 휴식과 만족’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추악할 수 없다.

성에 대한 그의 예찬은 성의 정신위생적 기능과 성이 창조적 기력의 근원이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육체적인 성이 육체의 반명제인 영혼을 육체와 화해시킨다. ‘남자들과 여자들 가까이에 멈춰서 그들을 바라보는 데에는, 그리고 그들의 접촉과 냄새에는, 영혼을 아주 즐겁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 사랑이 화해시키는 것은 이제 민주주의나 세계주의가 문제되는 인간세계의 범위를 벗어나서 더 깊고 넓은 곳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이미 사랑이 아니라 신비가 작용한다.

신비의 세계는 우선 크고 넓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세계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원과 무한의 우주개념 속에 나오는 ‘사과 모양’과 ‘행복’이라는 말들은 그것들이 주는 엄청난 불균형감에 우리들이 놀라고 있는 동안에 인간의 현실을 우주 속으로 끌어들인다.

우주가 우리들의 현실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우주가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크다는 것은 그 속에 우리들의 이 작은 세계도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이 작은 현실세계를 우주 속의 현상으로 보게 되면, 그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현실세계에서 바라볼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지구는 원래부터 우주 속에 들어 있었다. 따라서 우주적 안목으로 바라보는 사물의 모습이 지상의 이해관계 얽힌 눈으로 바라보는 사물의 모습보다 더 사물의 참모습에 가까울지 모른다.

휘트먼의 세계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 모든 생물들은 탄생 자체가 존재 이유이고, 모든 사물들은 존재 자체가 정당화이다. 그의 세계는 아주 건강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낙천적이라는 비난도 받는다. 그러나 미래와 과거를 동시적 조망으로 바라보는 신의 현재와 현재에 얽매여 있는 인간의 현재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다. 물론 휘트먼이 영원과 무한을 신의 조망으로 바라본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거의 불가지론적 회의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르면 모른다는 것을 모르게 되고, 자칫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에다 바탕을 두고 세상을 해석하기 쉽다. 모른다는 것을 알면, 적어도 그와 같은 해석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는 최종적인 해석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지 도달이 아니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휘트먼의 그와 같은 노력 중에는 직관에의 초월주의적 호소가 들어있다.

밤의 습기와 꼬투리 속에 들어있는 한 알의 콩은 신비스러운 우주에 대한 휘트먼의 인식이 범신론적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초라한 이 세상을 우주 속에 집어넣었더니, 이 세상에도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신비라는 것 말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주를 이 세상 속에 집어넣었다. 그랬더니 이 세상의 사물들 하나하나가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의 구체적 실현임이 드러났다. 이 세상을 우주 속에 집어넣는 것은 우주를 이 세상 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

이 세상 속에 우주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는 눈에는 사람과 자연과 신의 상호관계가 근본적으로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연보다 못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과 자연은 엇비슷하다. 사람이 결정적으로 자연과 같거나 자연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을 통해서다. 죽은 뒤의 영혼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우주와 합쳐지는 영혼이 이 현세의 육체에 있는 것이 위대하다. 영혼은 자연과 같고, 자연 속에 편재한다. 영혼은 또 더러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 

휘트먼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영혼의 커다람이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 영혼이 갑자기 커지는 것을 노래하는 것은 그 뜻이 죽은 다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영혼이 그 큼을 잠재력으로, 부분으로, 상징으로, 예언으로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 있다.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온전한 인간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휘트먼에게 영혼은 불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불교적인 그의 윤회사상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성을 통해서 육체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죽음을 통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확인한다. 그 둘은 거의 서로에 대한 파괴적 기력을 가지고 화합하여 온전한 인간을 이룬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우선 제도종교, 또는 교회기독교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휘트먼에게는 영혼과 육체를 가진 온전한 인간, 그가 곧 신이다. 모든 사물들에 나타나 있는 신의 뜻이 정작 신 자체를 잊어버릴 만큼 강조된다. 그러나 물론 휘트먼은 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나중에 신과 합쳐져서 형제가 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따라서 그러한 인간을 탄압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죄악에 그치지 않고, 종교적 우주적 죄악이 된다는 점이다.

휘트먼이 이상과 같은 그의 생각들을, 또는 그의 시에 나오는 ‘나’의 생각들을, 파격적으로 기술한 것은 그 생각들의 성질상 어쩔 수 없었던 일인 것 같다. 그가 그렇게 썼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들이 전달되었고, 그의 시의 그러한 형식이 곧 그의 혁명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자유시 형식이고, 더러 지루하게 끝없이 계속되는 나열이다. 자유시 형식은 휘티에와 롱펠로 같은 전통적인 시 인습에 충실했던 시인들이 널리 읽혔던 100년 전 당시로서는 가위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가 손수 펴낸 『풀잎들』은 증보를 해 가면서 여러 판들이 나올 때까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1855년에 초판 800부 미만을 자비로 찍었고, 그 중 200부를 우선 제본했다). 초판 한 권을 기증받은 휘티에는 책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것은 그 시집에 있는 일부 시들의 비도덕적인 음란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휘트먼은 ‘운율과 운율시인들은 사라진다, 시들에서 증류해낸 시들은 사라진다’고 했고, 『풀잎들』 초판 서문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그러한 생각을 그의 시에서 형식으로 실현했다. 매끈한 율격시에 대한 그의 반대는 단순한 시형에 대한 반대가 아니고, 그러한 시형으로 읊어진 봉건적 귀족적 전통에 대한 반대였다.

목록식 그의 기법은 크게 단어들과 구절들의 나열과, 대등절들의 열거로 나눌 수 있다. 그는 거의 모든 직업들의 이름들,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 강들·산들의 이름들, 나라들의 이름들, 동물·식물·광물·천체의 이름들, 추상명사들을 뚜렷한 논리적 질서 없이 혼돈으로 보일 만큼 장황하게 늘어놓고, 등위 접속사를 더러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하면서 대등절들을 전통적인 적절의 법칙을 무시하고 한없이 열거한다. 그의 『풀잎들』은 구대륙의 전통에서는 무질서로 나타나지만, 광대한 신대륙에서는 민주주의가 힘차게 뻗어나가는 것을 구현한다.       

휘트먼 시의 문학적 장치가 자유시 형식과 나열식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령 두운법과 같은 소리의 조화의 효과를 노리는 전통적 방법도 많이 눈에 뜨이지만, 중요한 그의 기법 중 하나로 추상적 진술과 구상적 진술의 섞음을 들 수 있다. 전반의 구체적 진술을 후반의 추상적 진술과 대조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추상적 문장들과 구체적 문장들을 묶음으로, 또는 한 줄씩, 섞고, 어떤 때는 한 줄에서 절반은 추상, 나머지는 구상으로 하고, 더 나아가서는 추상적 단어들과 구체적 단어들을 뒤섞기도 한다. 뒤섞음 자체가 나열식과 함께 휘트먼 특유의 문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문체가 라블레의 미친 소극의 뒤섞음과도 같이 문학의 기본 기능인 무너뜨려서 고르게 하기의 효과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