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1월 하순 보스턴 공항에 내렸을 때 슬슬 눈이 오기 시작했다. 마중나온 맥켄 교수는 나를 환영하는 눈이라고 말했다.

낯선 숙소에 짐을 올려다 놓고 술 한잔을 조금씩 입안에 머금었다. 하버드 야드의 푸른 잔디 위에 눈이 제법 쌓였다. 거리와 관련 건물을 익히기에 한참 걸렸다.

나는 비행접시를 타고 온 것이 아니었다. 곧 미 동부의 겨울 풍경과 ‘지식의 수도’인 이곳의 중후한 환경에 동북 아시아의 한 시인으로 왔다.

이런 곳에서 한국 혹은 한국문학은 무엇인가. 아무도 이 물음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할 사정은 아니었다. 아무도 이 물음에 제일 먼저 대답하겠다고 손을 바쁘게 들어올리는 사람도 없다.

미국에서의 한국문학은 어제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이 당당한 것도 아니다. 있다면 그것은 내일에의 염원과 함께 있는 어떤 것이다.

한국학이나 한국문학 전공은 한국학과와 한국학 연구소에 의해서 상당한 성과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엄청난 중국학이나 다양한 일본학에 견준다면 실로 미미한 정도인지 모른다.

1943년 최봉윤 강사가 UC버클리 동양어학과에서 미국 최초로 한국어 강좌를 설치한 이래 이제는 동부의 한 명문에서도 한국어 강좌는 물론 한국문학, 한국사 강좌가 상당수의 학부와 석박사 과정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감동적이다. 한국학 연구소의 운영도 이제 본격적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런 사실이 다른 학과에 견주어 볼 때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가르치는 일에서는 좀더 생생한 문학체험을 학생들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시는 시학 속에 있지 않고 제군들의 가슴 속에 있다’, ‘시학 혹은 시론은 시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죽어가는 시를 살려내는 것이 시론 강의라는 이름으로 만난 이 시간의 임무이다’ 따위의 말을 던졌을 때 지식으로서의 시를 대하게 된 학생들에게 뜻밖의 충격이 되기도 했다.

나는 봄 학기를 미 서부 버클리에서 보내야 했다. 그곳에서 강의 도중 두 번의 시낭송 행사를 마쳤다. 그것은 2년 전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의 과분한 지지로 된 버클리대 시낭송회와 미 원로시인 게리 스나이더의 친밀한 영어 낭송으로 된 블랙오크 ‘고은의 밤’이 성공한 이래 나에게는 낯익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포에트리’ 주간 리처드 실버그가 영어 낭송을 맡아 주었는데 그는 내 네 번째 영어판 시선집 역자이기도 하다.

그런 뒤 버클리대 졸업식이 있자마자 동부로 건너와 하버드의 원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아니 봄학기 중의 4월 15일 하버드 시낭송회가 준비없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난해 내가 북한에 다녀온 것을 KBS 일요스페셜 ‘민중시인 고은 금강산을 가다’로 제작한 비디오 상영을 겸했다.

그리고 10월 8일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맞아 ‘고은의 밤’이 개최되었다.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소는 한국의 대산문화재단과 뉴잉글랜드 한인단체연합회와의 공동주최를 서슴치 않았다. 한국학 연구소와 연결된 본국의 대산문화재단에서 나도 모르게 지원해 준 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미 동부의 한인 교포들도 하버드와 동떨어진 미 동부 현실과 달리 처음 시도하는 문화행사에 동참한 것이다.

시 낭송회를 위해서 하스 교수가 버클리에서 날라왔고 중국 문학의 세계적 권위인 ‘유니버시티 프로페서’ 로웬이 선시 부분을 영어로 낭송해 주었다. 한국학 소장 카터 에커트 교수와 D. 맥켄 교수도 함께 했다. 또 USC 서니 정 교수도 먼 길 마다않고 와서 함께 했다.

페인홀 5백석 1, 2층을 메우고 통로와 복도까지 청중이 찼다. 하버드 혹은 MIT, BU 등지의 백인 지식인들 2백여명과 한국 교포 및 유학생 3백여명이 열렬한 호응을 보여주었다.

그 다음날 나는 이 벅찬 행사에 만족해 할 겨를도 없이 서부 UCLA, USC 등지의 행사 때문에 떠나야 했다. 이어서 시카고대 미국시인축제, 멕시코대, 과달라하라대 시낭송과 네루다 1백주년 축제 시낭송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 미국 사람들이 새삼 한국 문학, 한국 시에 관심이 많아졌고 1․5세대 한국계 학생들도 한국 문학에 대한 긍지가 새로워져 가고 있다. 한동안 나는 이들에게 포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의 한국 문학은, 한국계 젊은 작가 이창래의 문학이 미국 문학인 사실과 함께 좀더 이곳 광대한 지역에서의 동등한 인식이 깊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는 헛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