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20세기는 근대화를 향한 쉼없는 노정으로서의 100년이었다. 이제 20세기가 막을 내리고 한국 현대문학의 나이테가 100줄을 넘기는 시점에서, 그 지나온 발자취를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기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일은 당연하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대산문화재단이 지난 9월 16～17일 이틀간에 걸쳐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한 ‘현대 한국문학 1백년’ 심포지엄에서는 지난 100년간 한국문학의 날줄과 씨줄이 되주었던 굵직한 주제들이 열띤 논의의 대상으로 올려진 20세기 한국문학을 결산하는 장이었다.
근대적 문학의 형성과 작가
첫 번째 주제 ‘근대적 문학의 형성과 작가’의 발제를 맡은 김재홍, 조남현 교수는 한국에서의 근대적 문학이 형성된 사상적 과정에서부터 문학과 작가 개념의 변천 양상을 각각 시와 소설 부문으로 나눠 추적했다. 시 부문의 발제를 맡은 김재홍 교수는 20세기 한국 현대시를 현실주의와 문학주의의 공시적인 갈등을 한 축으로 하고 전통지향성과 모더니티지향성의 통시적인 갈등을 다른 축으로 해 전개돼 왔다고 파악하고, 개인의 감수성을 중요시하는 문학이 보편화된 90년대 이후에는 생명사랑․인간사랑․자유사랑을 중요시하는 문학이 보편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소설을 중심으로한 조남현 교수의 발제는 근대소설의 형성과정과 작가 개념의 성립과정에 중점이 두어졌다. 조 교수는 작가라는 자의식이 명확했다는 점에서 이인직을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작가로 규정한 뒤, 근대소설의 부화를 이야기와 논설 사이의 갈등 과정으로 설명했다.
역사소설의 성취와 반성
20세기 한국문학의 특징적인 양태라 할 역사소설의 번창 문제는 2주제 ‘역사소설의 성취와 반성’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발제자로 나선 이재선 교수는 현대 역사소설의 변모 양상을 시대순으로 고찰한 뒤, 민족주의 및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지만 역사의 자의적 오용과 오락화․단순화를 가져왔다는 말로 그 성과와 부작용을 정리했다. 이주형 교수의 발제 역시 역사소설의 발전과정을 그 시대적 특징에 따라 분류했다. 이 교수는 민중적 시각에서 재해석된 역사를 생생한 삶의 모습과 함께 방대한 분량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장길산』 『객주』 『태백산맥』 등을 현단계 역사소설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민족어와 민족문학
3주제 ‘민족어와 민족문학’에서는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언어의 문제와 그 언어의 담지체(擔持體)로서의 민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홍기삼 교수의 발제가 후자 쪽에 비중을 두었다면 황현산 교수의 발제는 상대적으로 전자에 무게중심이 기울어졌다. 홍기삼 교수는 70년대 이후 구체화된 민족문학론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조건을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민중 개념의 축소․배타적 적용에서 그 한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황현산 교수는 근대적 언어로서 결함이 많았던 개화기 한국어가 보다 넓은 소통을 가능케 하는 근대어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서의 우리 시인들의 대응방식을 한용운, 이상, 서정주 세 시인의 작업을 통해 점검하였다.
시와 자연과 문화
2주제가 역사가 소설이라는 양식에 투영된 것에 대한 논의였다면 4주제 ‘시와 자연과 문화’는 자연이 시에 반영된 양상에 대한 논의였다. 발제를 맡은 오세영 교수는 그 양상을 감각적 세계의 인지 대상인 외적 공간으로서의 자연, 시인에 의하여 주관화된 내적 공간으로서의 자연, 신념을 통해 가상할 수 있는 관념적 공간으로서의 자연으로 구분하였다. 반면 이남호 교수는 김소월, 시문학파, 청록파 등 현대문학에서 자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시인 및 시파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를 통해 자연의 시적 형상화 경향을 설명하였다.
현대문학과 정치이데올로기
둘째날 열린 5주제 ‘현대문학과 정치이데올로기’의 내용은 정치이데올로기가 현대문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동시에 문학은 어떻게 응전해왔는가 대한 문제였다. 시대적으로 보아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대표의 발제가 해방 이후 현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김인환 교수의 발제는 개화기 를 논의주제로 삼았다. 김병익 대표는 60년대 후반부터 촉발된 문학의 현실참여가 군사독재 하의 점증된 긴장관계를 거치면서 어떤 방식으로 문학과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명하였다. 김 대표는 90년대의 약화된 문학의 실천적 기능의 새로운 가능성을 NGO 운동에서 발견한다고 하였다. 김인환 교수는 이인직에게서 구한말 기술이데올로기에 대한 오도된 맹신의 한 정점을 발견하고, 그 맹신이 일제의 강점으로 이어지게 된 과정을 추적하였다.
한국문학과 민중
6주제 ‘한국문학과 민중’은 현대문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민중문학에 대한 발제자들의 과감한 비판 때문에 심포지엄 시작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김철 교수는 70년대 이후 한국 민중문학의 상징적 존재인 김지하의 최근 행로를 통해, 민중문학과 그것의 투쟁대상인 파시즘과의 사상적 근친성을 논증하는 발표문으로 논쟁의 한 가운데 자리했다. 그에 따르면 김지하가 ‘율려 운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사상적 편협성은 민족․민중 개념의 절대화라는 민중문학 내부의 본래적 속성에서 잉태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다른 발제자인 정호웅 교수는 이인직 이후 한국문학 속의 민중은 총체적 분석능력의 결여 때문에 추상적 기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고 파악한다. 그는 또 민중문학이 가지는 정치성에서 말미암은 배제와 이분법적 속성은 관계의 단순화와 대상의 고정화, 주인공 중심주의로 이어져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하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20세기 한국문학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란 두 바퀴에 의지해 굴러갔다는 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7주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발제자로 나선 김우창 교수는 우리에게 익숙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정치담론의 문학적 번역에 불과한 것이라며 그 사고틀의 관성에 제동을 걸었다. 김우창 교수는 특히 현대문학 초기의 모더니즘 정착의 문제에 논의를 집중했다. 모더니즘이 본연적으로 장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부정의 속성에 비춰봤을 때, 이론적 실험 끝에 되돌아갈 수 있는 현실을 든든한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서구 모더니스트들에 비해 우리의 초기 모더니스트들은 귀환할 만한 마땅한 현실이 부재해 그 실험의 어려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발제의 요지였다. 이와는 달리 최원식 교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회통(會通)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살펴본 뒤 최 교수가 내린 결론은 지금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담론의 정립이 아닌 비평정신의 회복을 통한 작품으로의 귀환이라는 것이었다.
작품평가와 문학사
이틀간에 걸친 심포지엄의 대미는 ‘작품평가와 문학사’가 장식했다. 앞서 언급됐던 모든 주제들에 대한 논의가 결국은 개별작품의 분석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 논의들이 한데 묶여 문학사라는 큰 줄기를 형성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이 주제는 한국문학 1백년에 대한 토론을 마무리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시부문의 발제를 맡은 유종호 교수는 해방 직후 간행된 문학사 서적의 문제점들이 이후 문학사 서적들에 끈질기게 그 흔적을 남기며 한국비평의 수준을 위협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논파하였다. 그 문제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학 외적인 사실들을 도구삼아 시에 접근함으로써 문학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좋은 시(시인)와 그렇지 못한 시(시인)를 구별하는 일을 성실히 수행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문부문을 담당한 이동하 교수는 해방 후 문학사 서술의 문제점으로 서술자의 자의적인 판단기준에 따른 서술 대상의 선별 문제, 균형잡힌 비평사의 부재, 기행문․수기․수필․일기 등 비허구산문들이 배제된 문학사 서술의 관행 등을 꼽았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논의된 8개의 주제가 금세기 한국문학을 갈피지을 수 있는 중요 항목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 만으로 현대문학 1백년의 총체적인 흐름과 성격이 모두 규명됐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한 시대 문학이 보듬고 있는 삶과 생각의 세목들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엄에서 논의된 사항들이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한 보다 활발한 탐구의 단초를 제공해 줄 수는 있을 것이며, 이것이 심포지엄을 준비한 대산문화재단과 기획위원회가 실제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번 심포지엄을 잇는 진지한 작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