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황동규_시인, 서울대 영문과 교수. 1938년 생. 시집 『몰운대행』 『풍장』 『미시령 큰바람』 등
시집을 내면서 두루 손 본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이 시집에서도 거대 담론이 사라진 후 황지우가 빠졌던, ‘이래서 내 삶은 이 정도밖엔 안됩니다’ 식의 변명에 가까운 시들이 채 사라지지 않고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런 시들은 이 시집 중반 이후에 끼여 있다. 고쳤다 해도 이 시들은 그 후에 쓴 시들보다 질이 좀 떨어진다. 여하튼 변명은 하치의 수사학인 것이다. 「靑銅 마로니에 숲」 「해바라기 씨앗」 「서해까지 밀려 있는 강」(제목들도 손 본 감이 있지만)들이 그렇다.
다시 탄압이나 받았으면! (「서해까지 밀려 있는 강」의 중간 1행)
자학적인 이 울부짖음은 처절하기는 하지만 시인이 전에 바라던 세계 자체가 얼마나 ‘희망적’이었느냐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 자학은 이런 구절도 낳는다.
미쳐버릴 수도 없고 달관할 수도 없었던 것이
다 그놈[理性] 때문이었지만, 인간이라는 것들에게 뭐를
더 기대할 수도 없게 된 요즘 그래도 끝내
최소한도로 믿을 거라곤 그놈뿐 아닌가 하는데,
왜냐면 나에겐 그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靑銅 마로니에 숲」의 중간 5행)
아무리 話者니 시적 自我니 해도 시의 ‘나’는 소설의 ‘나’보다 시인에 가깝기 때문에 80년대를 그리워하는 소설들보다는 이 시들이 더 직접적으로 독자의 ‘연민의 정’을 일으키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황지우는 모르는 사이에 변모를 이룩했다. 원래 그가 연민의 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內藏寺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 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금만 더 머물다 가자.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끝 8행)
혁명을 통한 화엄이 아닌, 지상의 삶 속에서 화엄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이 영원이 아닌 ‘쬐금’의 시간일지라도 그것은 의미에 따라서는 영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그것은 「아직은 바깥이 있다」 「等雨量線」 몇 편, 「망년」 「발작」 등 여러 시편들이 과거에 지녔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잃지 않은 채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奇蹟 아녀 (「발작」 끝 2행)
하고 현실 삶에 대한 놀라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지면이 좁아 부족한 대로 끝을 내기로 하자. 황지우는 최근 자신의 선회를 ‘귀족성’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용어야 어떻든, 나는 그 놀라움을 그가 지난날의 ‘巨大 담론’과 좀 전의 ‘矮小 담론’을 통해 도달한 ‘巨小 담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