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김원일의 『Wind und Wasser』(바람과 강)은 1995년 대산 재단의 지원을 받아 1998년 독일에서 출간된 장편소설이다. 역사의 비극을 온 몸으로 체험한 한 인간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참회하고 결국 자연의 품에 귀의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한민족이 겪었던 역사적 굴곡과 풍수지리․판소리 등 토속적 정서를 담고 있어, 한국인의 정한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통해 독일 독자에게도 호소력을 지닐 작품으로 판단되었다. 리하르트 켐머링스Richard Kämmerings는 「이인태여, 그대 어디 있었는가」(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1998년 8월 19일, 32면)에서 “극동 아시아의 지혜가 풍겨 나오는 소설 제목을 보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작가 김원일은 전쟁과 배반으로 물들여진 나라,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자연의 순리 안에서 안식처를 마련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연주의적 스타일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98년 10월 10일자 「운저레 키르헤 Unsere Kirche」는 “김원일의 작품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주는 심오한 의미가 담긴 소설”이라는 논평을 실은 바 있다.

하이디 강과 나는 1년이 넘게 『바람과 강』을 붙잡고 씨름을 했다. 외국인과의 공역 과정이 으레 그렇듯, 서로가 어느 선에서 양보를 하느냐가 늘 문제 거리였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글자 하나 하나가 뿜어내는 맛, 문장의 밑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말투, 텍스트가 독자에게 보이는 몸짓을 보존하려고 힘썼고, 하이디 강은 독일 독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문맥에 맞는 단어, 어색하지 않은 문장, 삐꺽대지 않는 흐름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말의 맛이 살아나는 독일어 단어는 찾아지지 않았고, 우리말로는 자연스러운 문장이 독일어로는 앞뒤가 걸맞지 않은 문장으로 돌변하기가 일쑤였으며, 한 부분을 살려놓으면 다른 부분과의 연결고리는 어느새 이물질로 변해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실하곤 했다. 결국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조무래기 병사들을 희생하는 선에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피와 살을 일부 도려내더라도 뼈대만은 손상되지 않게 하려는 심정이었고, 하이디 강으로서는 원작과는 다른 체형을 지니더라도 숨쉬고 움직이는 소설 텍스트가 되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두툼한 코를 지닌 구리 빛 한국인을 파란 눈의 서양인으로 바꾸는 수술이었다고나 할까. 외모는 독일인이지만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구수한 한국인의 체취가 풍겨 나오는 번역물이 되기를 바랐지만, 독일인도 한국인도 아닌 괴이한 혼혈아가 탄생한 것은 아닌지.

막상 번역을 끝내고 출판사 교섭을 시작하자 그곳에는 부딪쳐도 끄덕 없는 장벽이 버티고 서있었다. 독일에서 한국문학이 그 존재조차 인지되지 못할 정도의 참담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너무 많다든지, 등장인물이 여럿이어서 식별이 잘 되지 않는다든지, 위험부담을 안고 출간을 하기에는 소설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든지 트집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결국 힘없는 자에게는 한 걸음 물러서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듯했다. 다행히도 중편소설을 개작한 장편소설이었기에 원작자의 양해를 받아 분량을 축소하는 작업에 임했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바람과 강』은 펜드라곤 출판사에서 <한국문학 시리즈> 제 1권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김광규의 『조개의 깊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김병익의 『한계의 경험』, 『모든 시간의 끝에서. 한국 현대 단편선집』이 시리즈물의 일환으로 간행되었고, 한수산의 『부초』,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등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풍風은 우주의 기氣요, 수水는 우주의 혈穴이다.> 기와 혈이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 이방인의 낯선 풍토에서 제 모습을 잃지 않을 문학작품을 주조하는 일, 외국어의 바람에 흩어지지 않게 수맥을 따라 우리 문학의 생기를 지키는 일, 그러면서도 맛깔스럽게 읽혀질 수 있는 외국어 텍스트가 되게 하는 일. 명당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