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일남_소설가. 1932년 생. 소설『흐르는 북』 『젖어드는 땅』 『누님의 겨울』 『하얀 손』 등
‘모든 시대는 오래 되면 좋아진다’ 는 바이런의 말이 아니라도 사람은 자신이 산 어떤 시대를, 두고 두고 잊지 못한다.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종내 끼고 가기 마련이거늘, 그런 때는 지극히 가혹했던 세월도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달게 녹아내리기 쉽다.
아무리 그렇기로 1950년대 초반의 우리 문학 환경을 좋게 기억하기는 어렵다. 다만 느낄 뿐이다. 문학하는 마음은 상황이 가혹할수록 더 좀 진지하다는 아전인수 논리에 기대어 ‘오래 되면 좋아지는’ 시대의 뜻에 어렴풋이 공감할 따름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확인한 문학 월간지 『문예』의 존재가 매우 크고 신통하다. 아직 문학에 털도 안 난 그 무렵의 내 눈으로 신통하다는 따위 웃자란 인식을 하는 게 아니다. 지나 놓고 보니 그렇더라는 말이다. 그 세월이 어떤 세월이라고 이 월간지는 6․25가 터진 해에도 ‘전시판’(戰時版)을 냈다. 나중에는 피난 수도 부산까지 끌고 갔을 망정 51년엔 한 권도 발간하지 못했다. 52년에야 재기를 시도했으나 겨우 두 권을 내는데 그쳤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몇 권을 더 내고 못냈느냐를 꼽다니 부질없다. 아니할 말로 문학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전쟁으로 국토가 결딴나고 인심이 거덜난 형편에서마저 밥도 돈도 안 되는 문학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대단한 의욕이요 극성이다. 세상이 제아무리 미증유의 요동을 칠지라도 붓대 하나로 파천황(破天荒)을 꿈꿀 밖에 없는, 그 짓 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숙명 아니겠는가. 그리고 독자들의 호응을 믿었을 터이다.
그런 경황에 보낸 것이 「쑥 이야기」다. 부산서 발행하던 『문예』 주소를 찾아 우편으로 부친 다음 한 동안 잊고 지냈다. 배달 사정이 시원찮은 데다 잡지 또한 나오다 말다 할 때였으므로 원고가 제대로 들어가기나 했는지 미심쩍었기 떄문이다. 그런데 잡지는 어느새 서울로 올라와 발행되었다. 집으로 배달된 53년 송년호를 받아 보고서야 내 작품이 실린 것(김동리 추천)을 알았다.
책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제3회)를 비롯하여, 오영수의 「갯마을」, 김광섭의 시 「해바라기」, 마해송의 「편편상」 연재 등으로 그들막했다. 이처럼 대단한 필진 속에 나도 새내기로 이름이 올랐으니 기분이 좋았으랴. 말석이나마 차지했으니 잠시 우쭐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제물에 곧 시들해졌다.
하필 ‘쑥’인가 싶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한 신인들이 들고 나온 제재(題材)가 흔히 전쟁이나 분단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도 더욱 초라해 보였다. 후회라기보다는 자충(自充)에 가깝고 자충이라기보다는 기질 탓이었으려니 여긴다. 쓰기로 들면 그 시절에 한참 떠돌던 극한 상황과 ‘연루된’ 소재를 붙들고 낑낑댈 수도 있었으련만 어쩌자고 쑥으로 쑥을 자초한 셈이다.
그 뒤로도 비슷한 생각이 가끔 떠올랐다. 좋아하는 이태준 채만식 같은 선배 작가들의 글을 요샛말로 열심히 벤치 마킹하면서 화끈한 걸 뽑아내자고 작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붓을 들면 눈앞에는 먼저 는개 같은, 모정(慕情) 같은 서정이 어른거리기 십상이다. 따라 나서는 기분이 더없이 촉촉히 젖을 망정 글의 예각은 머지 않아 둔각으로 바뀌고, 각진 표정은 어느덧 한갓진 유화의 모습을 띤다. 서투른 숙수 피나무 안반만 나무라는 꼴인데 도리가 없었다.
56년 정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파양」(爬痒)이 두 번째 추천(계용묵) 작품이다. 『문예』는 54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이미 문을 닫았기 때문에 출신지(誌) 이전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딴 일에 몰려 좀처럼 염을 못내다가 이왕 시작한 김에 따둘 건 따두자고 마음먹었다. 2회 추천을 거쳐야 기성 대접을 해 주는 격식에 비추어 「파양」 또한 데뷔작인 폭인데 제목 한 번 데데하다. ‘분신’ 생산자의 이름으로 이래저래 미안하다.
자기 작품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작가는 불행타 하랴.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그것도 힘이 되는 역설을 이따금 떠올린다. 들이굽는 팔을 남 앞에서는 내굽는 것처럼 보이려는 안간힘을, 겸손을 넘어 위장을 넘어 어떤 용틀임의 원천으로 삼을 수도 있을까. 문학의 넓고 다양한 오지랖 하나 믿고 괜찮다…… 괜찮다 자위할 수도 있을까.
세배하러 간 어느 해 정초였던가. 동리 선생이 하신 말씀을 그 뒤로도 가끔씩 생각했다. ‘신문 칼럼에 비해 소설은 문예적이더라’는 덕담의 뜻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