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1999년 12월 31일 24시가 2000년 1월 1일 0시로 겹쳐지며 세기를 건너뛴다고 해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데도 세계는 그 단순한 숫자의 전환에 홀린 듯 열광하고 있다. 그토록 이 세계는 새로운 세기의 이름으로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던가? 그러나, 정말 지금과 다른 세계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어떤 모습으로 20년후에나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짐작하고 진단하는 새로운 세기는 이미 20년 전에 시작된 미래일뿐이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시대로

이미 20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도 전부터, 21세기가 새로운 대중 문화의 시대로 열리리라는 것은 익히 예상되었었다. 이 진술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대저 세계의 문화사적 흐름이 그랬듯이, 기존에 저급한 문화로 취급되던 하층 문화(대중 문화)가 이제는 당당한 주류 문화로 부상할만큼 무르익고 있다는 게 그 의미의 하나라면, 다가올 세기에는 특별한 엘리트 층이 아닌 일반 대중이 문화 향유의 주체가 되리라는 점이 또다른 하나의 의미이다. 어쩌면 그 둘은 오늘의 상황에선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오래동안 우리는 문학․미술․음악처럼 가장 근원적인 단일 질료(언어․색․음)만을 사용하면서 그 형상물이 보존되는, 그리고 현실에 대해 일정한 초월적 거리를 유지하는 이른바 순수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 즉 배우고 향유해야 할 고급 예술이라고 간주하며 여타의 쟝르는 저속한 것으로 치부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삶을 임의로 재단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잘라버리려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밑받침되어 온 것이라면, 오늘날의 문화 현상은 그 이데올로기가 거의 폐기되어야할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영화․만화․대중가요․퍼포먼스 등은 물론, 광고나 컴퓨터 게임까지도 저나름의 자립적 문화 양식, 더 나아가 예술임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고 그것을 비난할 근거도 빈약해지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순수주의에 입각하여 단일/복합(혼합) 장르를 나누고 그것을 수직적 고급/저급(통속) 예술로 위계화하는 근대적 관점은 이제 별 가치가 없어져버렸다. 새로운 문화 양식들은 거의가 혼합 장르적 형태를 띠고 있고, 그러면서도 독자성을 내세우며 장르들 간의 수평적 평등성을 주장한다(이 장르들의 내적 혼합성과 외적 독자성을 설명하는 작업은 앞으로 꼭 필요하다). 이때 새로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장르냐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장르임에도 - 그 속에서 - 의미 있는 작품이냐 그렇지 못한 작품이냐는 것이다. 영화 장르를 예로 들자면, 그것은 그 자체로 고급하거나 저급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삶에 성찰을 제공하는 작품이냐 단순한 심심풀이용 작품이냐는 구분이 적용된다. 적절한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 구분은 예술-영화/오락-영화라는 새로운 이항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화나 팝 음악, 그리고 전통적인 문학에서도 사정은 거의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문화 양식이 다수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확대․발전되어 왔고, 그 결과 실감각에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시청각적 문화 양식이 점차 주류로 떠오르면서 그 와중에 심한 가치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중의 지위가 향상되어 거의 사회적 주도권을 거머쥐게 된 현실을 반영하지만(그런데 정말 그럴까?), 동시에 그 익명의 대중이 아직은 즉물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그것을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그들은 아직 자신의 욕구가 이끄는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뿐이지 그에 대한 자기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위에서 말한 가치 판단의 새로운 기준이나 적용 방식 따위도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것이지, 대중의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싹튼 것은 아니다.

세계시민화(?)와 언어 문제

한편, 이 대중은 얼핏 보기에 점차 세계시민화되는 경항을 보여준다.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인터넷 등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 체제로 묶여가면서, 문화의 국경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적대적 감정의 국가인 일본의 대중음악과 만화, 컴퓨터 게임 등이 심층적으로는 우리 젊은이들의 감각을 사로잡은지 오래되었다. 그 이전에 미국의 대중문화가 더 광범위하고 더 뿌리깊게 침투해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인데, 이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도 태반이 미국 대중문화의 교묘한 아시아적 번안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무심코 세계화라 부르는 것은 사실 거의 미국화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대중의 세계시민화란 것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우리 대중은 미국문화에 대해 전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제도를 좌지우지하는 미국 자본의 밀물과 함께, 그 흐름을 타고, 미국문화는 일방적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우리 대중은 그 물량 공세에 취해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이 진정한 문화인지를 따져볼 틈도 없이 그대로 휩쓸리면서 우리 문화의 자리를 속수무책으로 내주고 있는 것이다. 기껏 한다는 것도 우리의 새로운 창조적 문화를 지향한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전통 문화를 미국식으로 포장해 수출해볼 수 없을까를 궁리해보는 수준을 못벗어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문제의 심각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은 언어의 영역에서 일 것이다. 영어(라기보다, 미국어)는 세계공용어로서의 위세를 더욱 확장하고 있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영어의 인터넷 점령이다. 얼마전 다소 황당하게 영어 공용화에 대한 저널리스틱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영어 사용에 관한 불가피성/위기감의 소산임이 틀림없다. 그런 논쟁이 아니더라도, 생활 속으로의 영어 유입은 너무도 명백하다. 상품 광고를 필두로,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의 대중가요 가사가 우리 말 반, 영어 반 식으로 구성되는 것은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거의 자동적으로 영어의 생활화, 공용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언어가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면, 이 문제는 간단히 넘길 성질이 아니다.

만약 한국어를 포기하게 된다면(영어 공용화 논쟁이 물론 한국어 포기 논쟁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어에 토대를 둔 문화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대중가요에 영어 가사가 빈번히 쓰이며 그 양적 정도가 커지는 까닭은 그 노래의 구조 자체가 영어에 더 적합한 데 있다. 즉 노래의 질이 영어권 문화의 양식에 가까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가정해, 한국인이 영어만을 쓴다고 해서 거기 그나름의 문화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문화는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의 문화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근본적으로 던져야 할 물음은 이렇다: 우리가 처한 범-세계적(범-영어적) 문화 상황 속에서 한국어 문화는 더이상 가치를 가질 수 없는가? 60억 인구 중에 1억도 안되는 소수 집단의 언어 문화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 포기되어도 되는가?

대중문화 시대의 문학

위의 마지막 물음은 여기서, 저 앞에서 이야기한 대중문화 중심 시대의 문학의 문제로 맞물리며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위의 물음은, 새로운 대중문화의 물결 속에서 문학은 소멸할 것인가, 소멸해도 상관없는가 라는 물음과 이형동질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적 실감각과 직접 소통하는 시청각적 매체의 문화 양식은 장차 디지탈 방식에 의한 완벽한 가상현실의 체험마저 꿈꾸며 가공할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이에 따라 문자 매체에 의한 문학은 이미 크게 잠식되고 위축되어 왔다. 그렇다면, 문학은 언젠가 미라가 되기 위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가? 그때, 문학은 사라져도 문학성만은 다른 양식 속에 살아남아 영원할 것이라는 말로 위안을 구할 수 있을까? 혹시 이 말 자체가 모순은 아닌가? 문학의 실체가 사라지는데 문학성은 남는다는 말이 명제로 성립되는가?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 쓸데없는 동어반복을 행하지는 않겠다. 요약만 하자면, 그 논의에서 나는, 조금은 당위론적으로, 전체적 문화 지도 속에서 문학의 자리는 변두리로 밀려나겠지만, 여전히 그 자체로 살아남게 되리라고 결론지었었다. 무엇을 근거로? 다른 문화 양식 혹은 예술 장르가 대신할 수 없는 문학만의 몫이 있기 때문에. 이제, 그 연장선에서 나는, 다른 장르 속에 편입된 언어적․문자적 요소가 곧 문학성은 아님을 지적해 두고 싶다. 영화 속의 이야기나 대사는 영화 속에 들어가 문학성을 구현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 문학적인 것과 교류하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 궁극적으로 영화성을 구성하는 일부이다. 문화 양식이나 예술 장르는 실존적 개념인즉, 그 자체의 존재 방식과 효과를 통해서만 고유한 속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성은 문자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문학만의 몫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미미해 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결국 문학은 폐기되지 않을까? 솔직히, 이건 더욱 두렵지만 회피하기 힘든 가정이며, 또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나는 조금전에 나의 결론이 ‘조금은 당위론적으로’ 그렇다는 단서를 달았던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답했던 그런 결과에 실제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삶과 세계 구성에 대한 전망을 확보하고 그것을 위한 결정과 실천이 요구되는 탓이다. 대중문화에 아직 자기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했던 것도 이와 연관되지만, 새로운 미학은 기존의 윤리학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새로운 윤리학을 열어주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대해, 나는 21세기의 새로운 윤리학이 탈중심적 다원주의에 의한 진정한 민주적 삶의 이상에 기초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동의가, 어느 특정한 문화 양식이 주도권을 잡는 세계 대신 다양한 문화 양식들이 대화하며 공존하는 세계의 지향으로 나를 이끈다. 내가 보기에, 요즘과 같은 미국식 대중문화의 팽창은 근대사회 이후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이 문화의 탈을 쓰고 달려드는 끔찍한 꼴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그 연장선에서, 문학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내 주장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문학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내 판단은 그것을 극복해나갈 인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심원한 반성적 기능을 축적해온 문학은 새롭게 음모되고 있는 문화적 지배/종속 구도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대중 문화를 향해서도 그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되기를 권하는, 무력하면서도 유력한 힘일 수 있다.

한국어 문학의 세계화라는 과제

언어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세계를 영어만이 지배한다면, 그건 더이상 지배 언어에 대한 반성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영어에도 그나름의 내적 반성 장치가 내장되어 있겠지만, 다른 언어 체계가 없을 때는, 영어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기는 어려워진다. 저와는 다른 것을 통한 저 자신의 타자화가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므로 지구촌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에서 과장을 좀 하자면, 바벨의 방언들과 같이 되지 않는 한, 언어의 다양화는 다다익선에 가깝다. 이미 대세가 그렇듯이, 영어가 그 다양함을 연결해주는 하나의 기제로 사용되리라는 것을 거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영어가 전 지구촌 주민의 단일 언어가 된다는 것은 지구를 한 권력의 노예촌이 되게 만드는 첩경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한국어로 씌어지는 문학은 그 자체로 세계를 향한 발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영어화를 전제로 한국어로 쓰거나 애초부터 영어로 쓰는 한국인의 문학은 이미 한국문학이 아니다. 감히 말하건대, 오히려 철저하게 한국어에 투철한 한국문학만이 세계화의 가능성을 지닌다. 번역도 제대로 안되는데 어떻게 세계화가 가능하냐고? 지극히 역설적인 발언이지만, 번역이 잘 안될 때 오히려 세계화는 빨라질 수 있다. 번역이 잘 안된다는 것은 다른 곳엔 없는 어떤 우리만의 언어적 질감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독창적으로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몫이 아닌가? 당연히 그 번역은 어렵다. 어쩌면 완벽한 번역은 애당초 불가능하리라. 그러나 그 실패의 숙명을 미리 안고 있은 번역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 문학과 외국어 문학에 대한 풍요롭고도 깊은 관심과 사유와 반성, 그것이 바로 세계에 대한 기여이며 세계화 그 자체가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당히 엉뚱한(그렇지만 진지한) 발언으로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 - 진정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 - 를 위해서는, 우리 문화의 전체 문맥을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세계에 이해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우리 문학을 세계화한다는 것은 외국인의 이국취향을 단편적으로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따라서, 그것이 우리 나름으로 얼마만큼 의미 있었던 인간적 삶의 역사 속에서 어떤 언어의 그물망을 얽어왔는가를 큰 배경화로 내거는 작업이다(이 자리를 스쳐가는 소박한 희망 하나는, 한국 문화와 문학의 흐름과 결을 잘 일깨워주는 뛰어난 개설서들이 어서 나와 세계에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개별적 작가나 작품들은 그러한 배경 앞에서야 제대로 빛을 발할 터이다. 어떤 문학적 천재도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리는 법은 없다. 천재도 맥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예측하지 못하는 20년 후, 50년 후의 21세기에는, 문학이 자기 생존의 위기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질의 향상과 싸우게 되기를, 지금, 나는 꿈꾼다……